부자였던 적이 없는 나의 상상은 빈약하다

아노라

by 윤태진


나는 종종 부자의 삶을 상상한다. 통장에 몇조의 돈이 있어 더 이상 돈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지는 삶 말이다. 사고 싶은 것을 산다라는 인식 자체가 없는, 그저 갖고 싶은 것을 가져온다 정도의 인식만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문제라면 오직 가져온 물건을 둘 곳이 없다는 정도다가 아닐까? 물론 한없이 넓은 집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또 가져온 것을 찾는 수고가 필요할지도 모르니, 그건 또 귀찮다. 하지만 또 모른다. 갈망이 없으면 간절함도 없을 테니, 갖고 싶은 게 없을지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인생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부자였던 적이 없는 나의 상상은 빈약하다.


영화 <아노라>에는 부잣집 도련님이 나온다. 돈 걱정 없이 태어나면 갖고 싶은 게 없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은 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청춘이다. 거참 재미나게 사는 것 같아 뭐 조금 부럽기도 하다. 물론 정도를 지나친 감이 있긴 하지만 철이 없으니 젊음이고, 또 청춘의 일탈은 조금쯤 인용해 주기는 포용력 넘치는 세상이지 않냔 말이다. 무엇보다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로 돈도 많은데 걱정이 뭐람.

이반은 노느라 시간이 부족하다. 신나게 놀고 즐기고, 또 놀고 즐기고, 일상이 술과 쾌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도 젊은 시절 술 좀 마셨다고 자부하지만 어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돈 많은 친구가 있으면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인가? 돈 많은 친구를 만나본적이 없어서 콩고물을 얻어먹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이반의 친구들은 부자 친구덕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중 뉴욕의 스트리퍼 아노라는 좀 더 큰 야망을 품는다. 물론 아노라는 진심이고, 사랑이라 생각했겠지만 온전히 사랑만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돈이 한없이 많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불가피하게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돈이야 말로 없던 사랑도 샘솟게 하는 마법의 물건이니 말이다.

두 철부지의 불같은 사랑은 말 그대로 불같이 타오르고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부모님의 당연한 반대에, 한없이 위태로운 천 원짜리 라이터의 희미한 불꽃처럼 쓱, 힘없이 사라지고 만다. 자신을 내버려 둔 채 주저 없이 사라져 버린 ‘남편’ 이반을 찾아다니는 아노라는 혹시나 하는 기대와 제발이라는 간절함으로 이반의 사랑을 갈망하지 않았을까?

다잡은 것 같던 사랑과 풍요가 단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자 아노라에게 남은 것은 차가운 현실이다. 그리고 어느새 지워진 화장처럼 두려운 얼굴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돈이 있던 사람의 사랑은 허무했고 돈이 없던 사람의 사랑은 허탈했다.


사실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기는 했다. 유흥을 마음껏 즐기고 원 없이 돈을 쓰고, 심지어 결혼까지 내키는 데로 해버리는 삶이라니. 돈이 그토록 많다면 한 번쯤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살아보니 꼭 돈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고, 돈이 최고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 믿음이 흔들리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한 자기 합리화일까?


어쨌든, 모험과 요란함을 즐기기에 지금의 나는 너무 피곤해, 일탈은 영화로 족하다. 실제 영화는 충분히 즐거웠고 만족할 만큼 허탈했다. 역시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나는 내일 또 개미같이 일하고 티끌만큼 버는 삶을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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