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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Sep 06. 2022

그들과 헤어지는 법

01. epilogue 그리고 prologue

* 주스웨덴한국대사관 전경


외교관 생활은 이삿짐을 싸고 푸는 생활의 연속이다. 보통 근무지는 본부와 재외공관으로 나뉘는데, 다른 공무원들과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 재외공관 생활은 한 곳에서 2~3년 정도 있게 된다. 주기적으로 다양한 나라를 경험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주 근무지이자 생활 근거지를 옮기게 되고, 처음에 부임했을 때의 설렘과 떠날 때의 섭섭함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무뎌지게 된다.  


2019년 8월에 스웨덴에 부임한 나는 어느덧 올해가 되면서 이임할 시기가 되었다. 봄부터 시작된 수요조사와 인사발령을 통해 6월 말 다음 근무지인 브라질리아로 내정되었고, 7월 초 부랴부랴 이삿짐을 보내고 커다란 가구들을 비롯한 세간살이가 사라진 집안을 보면서 '다음 달에 여길 떠나면 내가 여기서 3년을 살았다는 흔적도 모두 사라지겠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7월이 되니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인사발령이 나고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업무를 마무리하며 후임자에 대한 인계인수 작업도 같이 하기 때문에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헌데 나만 바쁜 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모두 바쁜 터라, 내가 이 사무실을 떠난다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문득 이임 전날까지 조용히 있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공무원 생활을 26년간 하면서 많이도 옮겨 다녔다. 그것도 임지를 자주 바꾸는 공무원을 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다. 이번에 공관을 옮기는 것도 다섯 번째. 첫 공관을 옮길 때 공항에 배웅 나온 후배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길래 당황하던 순간도 있었고,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카드도 받고, '꼭 다시 오세요~'라는 말들을 믿으며 다짐하던 순간들도 있었지.


물론 지금은 그런 때도 있었네? 하는 쓴웃음을 짓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그렇게 눈물을 흘릴 만큼 순수하지도 않고 다시 온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모두가 각 방에 들어가 있는 재외공관의 근무환경은 더욱 그렇다. 하루 종일 안 보려면 안 볼 수도 있는 환경이기에, 어느 날 사라진다 해도 어 그 사람 갔네? 정도로 그칠 것이다. 나의 스톡홀름의 마지막 달은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지나갔다.


       


'카톡'


그러던 어느 날 동료 직원이 그간 내가 그려줬던 만화를 가지고 동영상을 만들었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근무를 하면서 가끔 그려 보내준 걸 모은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구나. 보면서 나도 웃었다. 그래 그땐 이래서 이 그림을 그렸지. 사무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짬짬이 그렸던 만화 쪼가리가 많이 나왔다. 당시의 추억도 떠오르고 그 만화들을 보면서, 그래도 이런 생각지 못한 선물도 받았으니 성공했네하고 자위했다. 기대는 안 했는데 그래도 한 명이라도 기억해주니 고마운 걸 넘어서 좀 덜 창피하다고나 할까.

동료 서기관이 보내 준 나의 만화 모음 동영상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드디어 스톡홀름에서의 마지막 근무 주간이 됐다. 목요일 부산세계박람회 지지 요청을 위한 스웨덴 통신청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오다가 대사관 단톡방에 카톡 공지를 받았다. 내일 나의 이임과 관련 오후에 잠시 '피카'를 간단히 할 예정이니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이 오후에 잠깐 커피와 쿠키를 놓고 한다는 '피카'. 그것이 나의 마지막 환송식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여러 생각이 났다. 3년간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내일 잠깐 있을 피카에 머쓱하게 이삼십 분 정도 앉아 그냥 상투적인 말만 나누고 나오겠지. 이삿짐이 떠난 내 집에 나의 흔적이 없어지듯이 그렇게 나의 존재도 없어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할 말도 없을 것 같고 아예 가지 말까?라는 생각도 했다. 다들 바쁜데 대단한 사람도 아닌 나 때문에 모인다는 생각도 좀 이상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날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말로는 이제는 감정이 메말랐는데 뭔 환송식이냐라고 하고 있지만, 그래도 3년을 지냈는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사라진다는 섭섭함이 있었던 거 같다.  



다음 날 오후 세시가 돼서 대회의실로 내려가는데 발이 좀 무거웠다. 도살장에 돼지가 끌려가는 기분?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며 가급적 빨리 인사를 나누고 올라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겠지. 다들 바쁜데 뭐. 그냥 때우는 거지.


 


대회의실에는 생각보다 많은 직원들이 와있었다. 휴가 중인 직원까지. 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잠시 후 한 직원이 나를 위한 송별 동영상을 만들었다고 틀겠다고 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그런 걸 만들겠다고 사진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닌데 언제 만들었지? 내가 그런 동영상을 받을만한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단순한 사진 나열이겠거니 하고 앉아서 봤다.

한 직원이 만들어 준 동영상. 고마웠다.


6분여 가량의 동영상인 그것은 나의 카톡 대문사진, 내가 보냈던 카톡 사진이나 출장 등 업무 사진에서 뽑아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동영상도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는데... 보다 보니 함께한 직원들과 웃음도 터뜨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감정이 좀 울컥였다. 나이가 들면 감정이 울컥 인다는데 나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적셔졌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너무 고마웠다.

직원들과 동영상을 보는 모습. 모두들 와하고 웃었지만, 나는 고마움의 눈물에 적셔갔다.
동영상을 바라보는 나를 누군가 찍은 모습.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울었다.


동영상이 끝나고 일어나서 얘기하라고 하는데, 어제 준비를 전혀 못한지라 횡설수설하다 앉은 것 같았다. 돈들도 없을 텐데 십시일반으로 모은 선물도 받고 대사관 서정에서 돌아가면서 사진도 찍었다. 남들만 이렇게 찍는 줄 알았는데. 나도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인생이 다 이렇겠지.

대사관 서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내가 가운데 서는 사진도 있다니.


그날 밤 직원들이 건네 준 카드를 펼쳐보았다. 모두가 한 자 한 자 써준 고마운 글들이었다. 그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제야 느낀 것 같았다. 내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구나.



그날 밤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잠이 오지 않아 작게 음악을 틀고 소파에 앉아 밖에만 바라보았다.

같이 있던 사람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좋은 말을 더 많이 건네지 못했던 후회감.

내가 마흔에서 오십으로 넘어가면서 겪은 사추기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닫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어느덧 재외공관 생활의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무뎌진 나에게

미안함, 감사함 그리고 다시 펼쳐질 새로운 임지에서의 공관 생활이

어쩌면 다시 좋을 수도 있겠다는 감정을 불어준 고마운 밤이었다.


마침 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한 구절이 더욱 가슴에 꽂혔던 그 밤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こんな日が來るなら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抱き合えば良かったよもっと 

좀 더 함께 했어야 했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vhSng8rgOw4

일본의 디바 小柳ゆき 의 대표곡 'あなたのキスを数えましょう(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 우리나라에서도 박화요비가 번안곡으로 불러 인기를 얻은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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