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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Nov 03. 2020

맥시멀리스트의 기쁨과 슬픔

가을맞이 짐 정리는 크나큰 슬픔이지만

 본가 부엌에 식세기 이모님(a.k.a 식기세척기)을 놔 드리기로 했다.


 엄마는 설거지 별거 없다고 인덕션을 더 원하셨다. 가스레인지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건강에는 인덕션이 낫다고 들었다. 사실 부엌에서 제일 골칫거리는 변신할 듯 큰 소리로 돌아가는 냉장고였다. 냉동 기능도 오락가락하는 것이 20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요란하게도 자랑했다. 

 부엌을 싹 뜯어고치는 수밖에.


 부엌을 고치기 위해 묵은 살림살이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온 집안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장식장을 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장식장을 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낡은 책장을 몇 개 버렸다. 책장에 잔뜩이던 짐들이 갈 곳을 잃고 먼지를 뿜어내기 시작해서, 온 가족이 목장갑과 마스크를 장착하고 분류를 시작했다. 


 다행히 요 며칠 날씨가 맑았다.

 문이란 문은 모두 열고 집을 다 뒤집었다. 묵은 먼지는 워낙에 단단히 각오를 했던 터라 죽은 벌레 시체가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본가에서 나올 때 내 몫의 짐들은 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각종 프린트물이 또 몇 박스 쏟아져 나왔다. 이번 정리 때는 몇 년 전 보다 미련이 더욱 없어져서 별 고민 없이 바로바로 핀을 뽑고 제본을 뜯어 그대로 재활용 박스로 직행했다. 

 나중에는 스프링 제본이니 뭐니 다 귀찮아서 대충 처박아 넣었는데, 엄마가 그걸 또 다 찾아서 일일이 분류하는 수고를 대신해 주었다. 

고등학교 때 썼던 독후감을 찾았다. 지금보다 그때가 더 글을 잘 썼던 것 같다. 

 버린다고 버렸는데, 초중고등학교 내내 받았던 각종 상장과 상패, 뭐시기 뭐시기 자격증, 내 이름이나 얼굴이 실린 자료나 선물 받은 논문 등등은 그래도 또 남았다.

 그리고 더 많은 기록물들. 그림일기와 교환일기, 받은 편지, 보내지 못 한 편지가 남았다. 글씨도 더럽게 못 쓰는 주제에 뭘 정말 많이 썼다. 공책 한 가득 정리했던 필기와 알록달록한 정리노트는 얄짤없이 버렸는데도 여전히 뭐가 많이 남은 느낌이다.

심지어 글씨도 그때가 더 잘 썼던 것 같다. 다시 공책 필기를 시작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 전에는 이런 기억들이 아쉬워서 못 버렸더랬지. 공들여 쓴 글자 하나하나, 뿌듯했던 기억, 다시없을 그 날을 추억하느라 잔뜩 쌓아 놨던 공책들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솔직히 눈에 밟힌다. 어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나 과거의 나에게 감탄하느라 오늘의 나에게 할애된 공간이 그렇게도 좁았다. 

 내가 남기고 간 짐은 베란다를 넘어 방 한쪽 구석에 쌓였다가, 결국에는 지워지지 않는 곰팡이처럼 동생 방에 자리 잡고는 존재감을 어필했다. 사랑하는 동생을 고생시키다니, 그래서 버렸다. 과거의 나보다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내 동생이 더 소중하니까, 공부고 명예고 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비싸게 주고 샀던 게 아까워 남겨 둔 전공서적은 당근마켓에 차근차근 올려봐야지.

 심지어 이때 읽었던 책도 그대로 있다. 많이 버리는 척했지만 어쩔 수 없는 맥시멀리스트인가보다. 

 뒤적이던 와중에 옛 연애편지도 찾았다. 

나 이번에 집 정리하면서 전남친이 써 준 편지를 하나 찾았다? 함 볼래?

 이런 건 또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내 옛 MBTI 분석 기록과 독후감 공책 사이에 회색 리본이 붙은 편지지를 집으로 가져왔다. 편지도 가져왔다고 했더니 남편 목소리가 꽤 커졌다. 

"너 이 녀석, 뭘 가져왔다고? 어디 이리 봐봐"

"같이 볼래? (읽는 중) 글씨체가 좀 친숙하지 않아?"

 부엌에 있다가 말고 후다다닥 와서 편지를 열어 보던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꽥지르더니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내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고는 넓지도 않은 거실 반대편으로 냅다 도망쳐봤자 금방 잡힌다. 제가 제 손으로 써서 줬던 편지를 양 손으로 움켜잡고는 찢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쩔쩔매면서 온 집안을 헤매고 다녔다. 

야...!!!!! 너!! 이게 어디서 났어? 나 이거 준 적 없는데..!? 이건 아니야!!

  박장대소를 하며 그거 버리지 말라고 매달리는 나를 질질 끌고는 끝내 창문을 열어젖혔다. 밖으로 날려버릴 거라고 소리소리를 지르는 꼴이 어찌나 우습고 귀엽던지, 층간소음 생각도 못하고 큰 소리로 낄낄거리고야 말았다. 방충망은 뻑뻑해서 잘 열리지 않았다. 


 와, 쌓아놓고 살았더니 또 이런 재미가 있구만 그래.


공책은 역시 앞에 만 몇장 써야 제맛. 이런 공책을 몇 권이나 발견했는지 모른다.

 옛 편지는 봉인(?)하기로 했다. 신랑은 얼떨결에 새 편지를 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가 말실수를 흘리는 바람에 몰랐던 사실들까지 알았다. 나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몇 통 있다는 사실과, 그의 본가 책상에서 찾았던 이름 없는 편지의 주인이 전여친이 아니라 나였다는 사실 등등을.

 당분간 남편을 신나게 놀려먹을 건덕지가 생겨서 기분이 좋다. 


 앞으로는 많은 글들을 데이터로만 저장할 테니, 퀘퀘한 종이 쪼가리를 뒤적거리는 재미는 덜하겠지. 그때를 위해서라도 수기를 남겨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나저나 우리 남편은 내가 써준 편지를 설마 다 버린 걸까. 그렇다면 그가 쓴 리본 달린 촌스러운 편지지를 들이밀면서 괴롭혀야지. 아, 오늘 저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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