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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Oct 27. 2020

월경과 폐경

해도 뭐라고 하고 안 해도 뭐라고 하고

 간밤에 신랑에게 기사 하나를 읽어주었다. 수족냉증이 있는 사람은 떡볶이나 불닭처럼 매운 걸 먹으면 일시적으로 혈액순환이 빨라져 좋다나 뭐라나. 내가 떡볶이를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그래서인가 보다고 덧붙였더니 남편이 말했다.

그 떡볶이 하나 먹는 데에 되게 핑계가 많구나. 그냥 먹어도 돼.

 얼마 전에는 떡볶이가 왜 월경통에 완벽한 해결책인지에 관한 기사를 읽어줬던 터였다. 굳이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지 않았더라도 그는 늘 나와 함께 분식집에 가 주었건만, 나는 그래도 이유를 꼭 갖다 대고 싶었나 보다.


 나는 솔직히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므로, 좋아한다고 많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떡볶이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으니 PMS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물론 달거리 중에는 포만감을 잘 못 느껴서 평소보다 많이 먹고는 한다. 거기도 뭐 어쩌고 저쩌고 한 호르몬과 인체의 신비 따위의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는 건데. 그럼에도 굳이 굳이 변명을 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뭐, 생리 중이야?

 남편은 단 한 번도 물은 적 없지만, 나는 언제나 지레 겁을 먹었다. 심지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라던가,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그래"라고도 한 적 없다. 뭐, 치약 가지고 다퉜을 땐 치약이 그렇게 대수냐고 뭐라고 하기는 했다.

밀라노 대성당에서. 여행 중에 터지면 짜증 난다. 화장실 가기도 귀찮은데 정말.

 나는 사실 '여자'로 규정당하면 손해인 것 같아 계속 변명하고 있는 거다. 신랑은 나를 '여자 취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몇십 년 간 습관처럼 몸에 밴 두려움이 있다.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딱지가 두려워서, 어떨 땐 호르몬 핑계를 댔다가, 호르몬 덩어리 취급하지 말라고 했다가,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다.


 두려움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고는 한다.


호르몬 [명사] 동물의 내분비샘에서 분비되는 체액과 함께 체내를 순환하여, 다른 기관이나 조직의 작용을 촉진, 억제하는 물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 =내분비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호르몬의 영향으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가 '호르몬'을 이유로 무게를 잃거나 부정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달거리 중에는 짜증 수치가 높으니까, 똑같은 말도 더 기분 나쁘게 툭,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형태가 어떻든 결국은 '똑같은' 말이다. 없는 말이라던가 다른 말이 아니다.

 정말 호르몬이 문제였다면 폐경 이후의 목소리는 뭇 남성과 똑같이 중시되어야 맞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월경한다고 무시당하고, 늙은 여자는 폐경기라고 또 무시당한다. 폐경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널리 널리 모두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전에도 그랬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계집애와 사내자식을 구분하니까, 호르몬은 그냥 핑계고 카산드라의 예언에는 믿음이 없다.


 나이 든 여자는 폐경기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아프고 오락가락한다고들 한다. 여성의 병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원인불명'과 '스트레스성'으로, 혹은 그저 '몸이 약해서'라는 처방을 받아 왔다. 남성이라고 나이 먹고 호르몬이 줄지 않겠는가. 다만 연구의 기준이 '성인 남성'으로 잡혀 있으니 전립선과 고환과 그 주변을 둘러싼 연구는 이미 예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을 뿐이다.

 남성이라고 나이 먹고 호르몬 불균형으로 성격이 오락가락하지 않겠는가. 그 불균형을 오죽하면 '여성화된다'라고 표현하겠는가. 짜증내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련의 억지를 '여자 같다'라고 표현하는데, 누가 냉큼 '나는 억지스러운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인정하겠는가.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부정할 수 없는 나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여성'으로 규정되는 게 두렵다. 배우자는 정작 아무런 편견도 없는데, 어째 계속 '나는 여성적이지 않다'고 습관처럼 부정하고 있다.


 어느 인터넷 짤에서 봤는데, '남의 탓'을 해야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한다. 그러니 이건 내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다, 세상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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