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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Nov 04. 2020

말싸움 잘하면 브런치 북

배운 것 다 어따 써먹나 했더니만 잔소리할 때 요긴하다

 어릴 적, 아빠가 당신 친구 아들이랑 결혼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를 두고 나는 "대학원까지 공부할 건데. 과연 그걸 기다리려나"라고 답했다. 별생각 없이 혀를 놀린 벌로 대학원을 갔나 보다.

 가서 보니 허구한 날 논문 보고 논문 쓰고 논문 보고 또 뭘 써야 하는데, 영 재미가 없어서 석사만 부랴부랴 마치고 학계를 떠났다. 대충 돈이나 벌면서 공부는 영원히 절대로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어느새 집구석에서 살림하는 아줌마가 되었지만, 커리어는 아까워도 석사에서 그친 애매한 학벌은 영 아깝지가 않다.


 교단에서 먹고살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써먹을 데가 더럽게 없다. 석사 졸업논문은 그냥 인쇄업계에 몇 푼 투자한 셈 치고, 종이를 낭비했으니 나무에게 사과하는 걸로 마무리.


 마무리라고,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루트, 리미트, 삼각함수, 그리고 음운, 형태소, 용언 등등이 다 무슨 소용인가 했더니, 뭔가를 이해하고 새로운 자격증을 따는 데에 다 유용하게 쓰였다. 그래도 석사논문만큼은 진정한 무쓸모의 절정이라고 생각했건만,

 잔소리 스킬 레벨업에 적절히 응용하고 있다. 

은허 유적에서. 한 때 고고학 한다고 땅도 파고 그랬는데 이제는 한자도 잘 못 읽는다.

 결혼을 하고 잔소리가 늘었다. 근데 늘어 난 잔소리를 신랑 아닌 내 몸이 감당을 못 했다.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 하는 입장도 꼴에 스트레스라, 하면 할수록 체력이 딸렸다. 살기 위해 최소한의 잔소리로 최대한의 효용을 뽑아내려다 보니 점차 기술이 늘기 시작했다. 

 우선은 명확한 문제제기부터 시작한다. 논문 쓰는 과정이랑 똑같이. 어제 너네 부모님이랑 통화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라는 현상을 먼저 가져온다. 이어서, 이 현상이 어떠한 의의를 갖는가를 설명한다. '나에게만 오는 전화'는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문제를 가진다(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은 너에게 전화하지 않으므로, 나만 시간과 감정을 두 배로 소모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확인한 후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다. 질적 접근을 해도 되고, 양적 접근을 해도 된다. 질적 접근은 연역적이고 양적 접근은 귀납적이다. 둘 다 합당한 논리 전개 방식이니 신랑이 말빨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석사 때 머리로 배웠던 논리적 접근을, 잔소리를 통해 몸으로 익히고 나니, 에세이 쓰는 것도 좀 편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 나갈 것인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삐딱한 아내의 북경라이프>

  화룡점정이라고, 결론을 함부로 내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데, 대부분의 경우 그게 제일 어렵다. "또 부모님한테 먼저 전화 안 드렸구나, 정말 구제불능이구려"는 논리적 비약이며 잘못된 결론임을 나도 안다. 그런데도 자꾸 결론으로 후다닥 뛰어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범위, 언급해 놓은 내용을 근거로 그 안에서 결론을 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꾸 성급히 결론을 도출하고는 한다. 의식이 흐르는 대로 적어놓기라도 하면 모를까,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결론에 도착하니, 완벽하게 똑같은 경험과 상식과 사고 과정을 갖추지 않고서야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때로는 뭔가 거창한, 잔소리의 경우 상당히 극단적인 결론 내려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뭔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만 가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의미부여라던가, 효심 따위의 가치를 들먹이려 하면 억지가 되어 버린다. 솔직히 갈등의 불꽃이 파바박 튀는 현장에서는 완급조절이 전혀 안 되기는 하지만...

브런치 에디터 추천작에 올랐을 때. 다시 만나기 어려울 행운을 기념으로 캡처해두었다.

 잔소리는 할 때는 통쾌한데 하고 나면 좀 후회가 된다. 더 논리적으로 다그칠 수 있었는데(!), 하고. 논문도 다 쓰고 제출할 때는 뿌듯했던 것 같은데, 몇 년 뒤에 다시 보니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졸작이다. 브런치 북도 마찬가지다.

 퇴고 좀 몇 번 더 할 걸 그랬다. 


 호랑이를 꿈꿨건만 털도 듬성듬성 하니 볼품없는 괭이 새끼 같은 것이 나왔다. 그래도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부둥부둥하고 있다. 자식을 낳으면 첫째는 실험작이고 둘째는 성공작이며 셋째는 완성작이라던가. 나는 첫째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내가 내놓은 첫째는 영 못마땅하다. 


 뭐, 태어났으니 잘 살아봐야지.  


 괭이 새끼도 요로코롬 당당하게 살아가니까, 더 많은 브런치 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지나친 의미부여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가 아는 범위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브런치 북들이 쏙쏙 움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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