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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Nov 12. 2020

내 남편은 내연남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는

*본 글은 허구에 바탕을 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하나.


 일상을 흔드는 증거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야간근무는 사람의 하루를 뒤집어 놓는다. 뒤집어진 하루, 하루가 모여 일상이 된다. 뒤집힌 일상은 양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물구나무 선 모양새로 흔들거리며 버티는 것과 같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두 발로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굳은살 박힌 손으로도 주변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기란 영 쉽지 않다. 똑바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머리는 저 위에 있어서 눈 한 번 마주치고 대화하기에도 버겁다. 

 그러니 물구나무 선 남자의 아내는, 서있다. 이 사람까지 뒤집어 세울 수는 없다. 쓰러질 듯 흔들거리는 몸뚱이를 의지할 수 있는 아내, 잠시나마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 우리의 보금자리가 흔들린다. 물구나무를 서기로 계약 한 순간부터, 막연하게나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찾아 올 지 몰라 불안했던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꿈속을 헤매던 나를 끌어올린 전화 한 통화. 그는 아직 꿈이 잔뜩 낀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겠다는 듯이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는 아침이었을 시간, 자신감 넘치는 맑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그를 뒤로 하고 늙은 몸뚱이는 다시금 모로 누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 폰에는 아내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아내의 전화번호. 아내의 이름이 아니라 전화번호가 떴다. 저장 해 놨는데, 어떻게 다시 번호가 뜰 수 있는지 의아한데, 아내는 이미 나가고 없다. 언제나 그랬다. 그것은 점점 실체를 띠기 시작했다. 

 아내는 자기 번호가 아니라고 했다. 맨 끝자리가 달랐다. 아내의 번호는 010-6761-1234인데, 신원미상의 전화번호는 010-6761-1235였다. 토씨 하나 빼고 똑같은 번호를 보는 아니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건, 괜찮아. 아무리 뒤집혔어도 오랜 세월 섞여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괜찮아. 괜찮다고 아무리 되새겨봐도, 분노의 탈을 쓴 이성이 고개를 쳐든다. 

 아내와 같은 번호를 한 그 남자는 대체 나에게 왜 전화를 걸었을까.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경쾌하게 전화를 끊지 않았던가? 그는 나의 많은 부분을 이미 들어 알고 있을 테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목소리가 어땠던가, 잠결에 들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면, 내 눈을 가리는 수밖에.


 그러나 실은, 그렇게 오래도록 가려왔다. 두 눈 위에 손을 얹어 가려보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하늘은 물구나무로 만신창이가 된 손가락 틈으로도 결국은 비집고 들어 오는 것이다. 

이 말썽꾸러기 통통이는 제겁니다만.


이야기 둘.


 지하철은 너무 덥다. 나만 땀을 흘리는 것 같기는 하다. 평균보다 통통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워낙에 땀이 많았다. 열성 체질. 생각 난 김에 한의사가 뭐라 뭐라 시답잖은 소리나 해 대는 유튜브나 보면서 출근길 갑갑함을 잊어보려는데, 이어폰을 안 가져왔다.

 게임하면 된다. 1시간쯤이야 금방 간다. 안타깝게도 중국에서 찍어내는 양산형 게임은 벌써 재미가 없다. 지워버릴까 하다가 2천 원이 아까우니까 그냥 놔둔다. 폰 새로 사야 하는데 좀 귀찮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용량 좀 작고 액정만 좀 깨졌지 나머지는 멀쩡하게 돌아가니까, 굳이 새 폰이 필요한가도 싶고.

 게다가 폰 살 돈 있으면 투자를 해야지. 주식앱을 켠다. 오늘도 개미들은 코로나주니 백신주니 화이자주니 뭐니 난리다. 콜드체인주를 저번에 좀 이르게 판 건 아쉽지만, 벌써 이번 달 월급보다는 많은 돈을 벌었다. 대출금 나가는 중이라 다달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이 심히 적으므로, 주식 열심히 해서 월세라도 모아야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2호선 반 바퀴를 돌아 출근 완료다.


 보통은 저장 안 된 번호로 걸려 오는 전화는 잘 안 받는데, 요즘은 외국이랑 컨택할 일도 있고 해서 일단 다 받고 본다. 연말 되면서 요즘 폰이 아주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지경이다. 어느 날엔가는 아내의 본가에 가서 저녁 먹다 말고 30분 넘게 통화한 적도 있다. 

 오늘도 사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오전부터 연락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모른다. 대리상이랑도 통화해야 하고, 아마 저번에 내가 놓쳤던 연락도 있던 것 같은데, 급하면 다시 연락하거나 문자 하겠지. 바쁘게 이멜을 쓰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라 일단은 이게 급하니까 담에 다시 연락해야지, 하고 보니 내 번호였다. 


 진동 두 어 번 울리는 그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 번호로 나한테 연락이 올 수도 있나? 통신사인가? 통신사는 아닐 것 같다. 아마 114로 전화가 올 테니까. 카드사 일리도 없고, 내 번호로 나에게 전화를 한다는 건, 뭐 정부 관련된 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정부라면, 공과금 관련인가? 저번에 공과금 내는 걸 한 번 밀려서 이자라고 해야 하나, 수수료도 낸 적 있기는 하다. 몇 백 원 밖에 안 되기는 하는데, 와이프한테 잔소리 좀 들었다. 혹시 주기적으로 체납하는 상습범으로 찍힌 건 아니겠지. 집에서 혼나는 건 괜찮지만, 공식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잘은 몰라도 뭔가 불편한 상황이 생기고, 그러면 두 배로 혼나려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와이프가 우리 부모님한테 나의 치부를 일러서 대판 혼난 게 진짜 몇 주 전이다. 큰일이다. 집으로 연락이 가기 전에 내가 빨리 해치워야 한다.

 

 근데 다시 보니 번호가 좀 낯설었다. 내 번호는  010-6761-1235인데, 이건 맨 뒷자리가 '4'였다.  전화를 받아 보니 왠 정신없는 아줌마가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거 빨리 티그리한테 알려줘야 하는데. 


밥 잘 먹는 우리 집 통통이가 날 두고 바람을 피울 수 있을까?


이야기 셋.


 우리 신랑은 멀쩡한 내 이름 놔두고 오만가지 별명으로 나를 부른다. 처음에는 '자기'라고 많이 불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뭐 티제이, 티그리, 뺙뺙이, 티티, 집사 등등. 나를 '애기'라고 부르는 게 싫어서 똑같이 '애기'라고 불러줬더니, 남편은 좋아라 한다. 본인이 별명으로 불리고 싶어서 나를 그렇게 온갖 별명으로 불렀나 보다. 

 이런 식이다. 

  애기야, 나 오늘 진짜 대박 웃긴 일이 있었는데, 지금 빨리 얘기해주고 싶은데, 이게 진짜 웃기는 일인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좀 슬픈 일이거든? 지금 얘기해도 돼?

응 안돼 애기야, 너 지금 지하철이잖아. 잘 안 들리기도 하고, 시국이 시국인데 대중교통에서 전화통화 너무 오래 하면 눈치 보여~


 알겠다고 전화를 끊는 목소리가 엄청 들뜬 것이, 회사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다 똑같고 맨 뒤에 한 자리만 다른 번호로 연락이 왔다라, 그것도 좀 정신이 산만한 아줌마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이한 일이었다. 나의 추측은, 첫째, 불안장애가 있는 아줌마가 다짜고짜 번호를 눌러봤는데, 네가 받았다. 둘째, '도를 아십니까'에 빠진 아줌마다, 였는데, 둘 다 틀렸다.


 아줌마의 남편이 이 번호가 '커플 번호'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알았어. 다시 한번 정리해볼게. 그러니까, 아줌마가 전화해서 해명 좀 해달라고 했다, 근데, 남편이 네 번호를 가지고 있다고? 아, 알았어. 다시 정리해볼게 그럼. 아저씨한테, 네가 전화를 걸었고(그래 알았어 알았어 부재중 전화), 근데, 자기 부인이랑 번호가 똑같으니까, 커플 번호라고? 그리고 그 아줌마가 너한테 전화를 걸었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이게 대체 말이야 똥이야?


 내가 요즘 전화할 일이 많았잖아. 저번에 부재중 전화가 와 있길래 대리상인 줄 알고 다시 걸었거든? 근데 잘못 걸린 전화더라고. 당연히 잊고 있었지.
 근데, 그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와서는 대뜸, 자기한테 왜 전화를 했냐고 하잖아.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쌈 싸 먹는 소리야. 부재중이 와 있으니까 전화를 걸은 거잖아. 대충 들어보니까 그냥 말도 안 통하는 경상도 아재야, 야간근무 한대. 자기 핸드폰, 뭐 전화 목록도 볼 줄 모른다고. 웃기잖아.
 나 뭐 그냥 '저는 서울에 있고요, 제가 왜 그쪽한테 전화를 하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했지. 아줌마가 막, '아휴, 서울이세요? 아유, 다행이네, 그럼, 저 이제, 저, 이거, 설명 좀 해주세요'이래.

 아 근데, 그 아줌마가 너무 불쌍하지 않아? 사고 회로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아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아깐 웃긴 얘기라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좀 웃픈 얘기네.



 

 쉰은 훌쩍 넘은 듯 한 목소리의 주인공 하고는 끝까지 말이 안 통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커플 번호'라고 생각하지 않겠냐고 되물었다는데, 바쁜 와중에 어이 털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냥 대충 마무리하고 끊었단다. 

  신나게 에피소드를 풀어놓던 남편은, 얘기를 하면 할수록 의기소침했던 아줌마가 걱정이 되었나 보다. 세상에는 제 눈 앞에 와이프처럼 땡글땡글한 표정으로 잔뜩 사랑받고 사는 여자도 있는데, 덜떨어진 망상에 사로잡혀가지고 말도 안 통하는 남자랑 같이 살아야 하다니, 불쌍하다는 것이다. 


 근데, 뭐 캡처해서 증거로 들이밀어도 안 통할 것 같아. 오히려 그 아줌마를 옹호한다고 생각해서 더 의심하지 않을까. 


  남편은, 나랑 똑같은 번호를 가진 남자가 세상에 있으면 그냥, 신기하다, 하고 말 거란다. 음, 그건 또 그냥 그런대로 약간 섭섭하기는 하지만, 역으로 우리 신랑이랑 똑같은 번호를 가진 여자애가 있다고(이미 어떤 아주머니가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알았으니까) 해서 '내연녀구나...!!!'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커플 번호라니,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고, 실수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의처증 좀 대단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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