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뭐보지' 리스트 TOP 3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일러문]과 [웨딩 소녀 피치]로 시작해서 [포켓몬스터]와 [디지몬]을 거쳐 [이누야샤]로 유년기를 가득 채웠다. 사이사이에 [은하철도 999]나 [드래곤볼], [그랑죠], [지구용사 선가드]도 챙겨봤고, [가오가이거]나 [전설의 용자 다간]은 꼬맹이를 자못 진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액션 장르를 좋아한다고 [카드캡터 체리]나 [신데렐라 이야기]를 놓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OST를 합창하곤 했는데.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만화책으로 장르를 갈아탔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내돈내산'이다.
만화책을 볼 때면 '이건 꼭 애니로 나와야 해!!!'를 외치다가, 정작 애니화가 결정되면 불안해진다. 작화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영화화가 호불호가 갈리듯 만화의 애니화도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에도 일본 애니가 점점 더 많이 올라온다. 만화사와 넷플릭스 간 독점계약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상영하는 애니메이션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많아서 뭘 봐야 할지가 고민일 지경이다. 1분 1초가 아까운 어른들의 시간 절약을 위해 골라 본 뭐보지 리스트 TOP3.
원작이 존재하는 애니메이션
작화/퀄리티도 중요
어른을 위한 스토리
(단, '어른스러움'과는 상관없는 지나친 성적 대상화/성애물은 제외)
조건을 만족하는 일본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 뭐보지 TOP 3을 취향껏 골라보았다.
3위. 위로가 필요한 어른에게는 [리락쿠마와 가오루 씨]
'리락쿠마'는 만화책이 아니라 캐릭터로 세상에 먼저 등장했다.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서 2000년대 후반, 2010년대에 걸쳐 웹툰과 카툰 에세이가 출판되었고, 2019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애니메이션이 공개되었다.
리락쿠마 공책이나 필통을 한 번이라도 산 사람은 이 애니메이션을 봐야만 한다.
매 회차가 10여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전에 누워서 한 두 편 봐도 좋고, 혼밥 할 때 틀어놓기에도 좋다. 모션 픽쳐로 찍은 클레이 애니메이션 특유의 '밥 씬'이 정말 좋기 때문이다.
리락쿠마가 휘적휘적 팬케이크 반죽을 준비하는 장면이나 새카맣게 다 태워먹는 장면에도 그저 웃음이 난다. 돌돌 만 계란말이를 담은 도시락은 클레이인 줄 알면서도 군침이 돈다. 가늘어진 눈으로 오물오물 먹는 모습도 귀염댕댕구리라 마음이 편안해진다.
리락쿠마가 아무리 귀여워도 어쩐지 주인공은 '가오루'다. 집, 회사, 집, 회사, 종종 걸려오는 부담스러운 부모님의 전화, 그리고 집, 회사가 전부인 1인 가구가 가오루의 정체성이다. 평범한 회사에 평범한 일거리에 평범한 나. 가오루가 맥주를 한 캔 까는 날이면 나도 함께 맥주 한 캔 까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다만 독신여성을 묘사하는 일본 애니의 전형적인 방식이라던가 맥락 없는 긍정 파워는 감안해야 한다. 서류봉투를 왕창 넘기면서 '손글씨를 제일 잘 쓰니 봉투에 주소 좀 싹 다 적어달라'는 상사의 주문에 "그래! 나만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어!"라니, 주소 정도는 그냥 제발 라벨지에 프린트해서 붙였으면 싶은데 말이지.
2위. 퀄리티를 제대로 살린 애니메이션화 [아인]
2015년에 극장판 애니메이션화가 먼저 결정된 다음 2016년부터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아인]은 넷플릭스가 전 세계 독점으로 서비스 판권을 취득한 시리즈다. full 3D로 제작되었지만 [토이스토리]처럼 입체감을 준 건 아니라 만화 원작의 느낌을 버리지 않았다.
호랑작가의 2020년 최신 공포 웹툰 시리즈의 CG효과를 떠올리면 된다. 내용도 자못 공포니까, 맥락이 닿는 것 같기도.
[아인]은 총과 피가 난무하기 때문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청불이지만 야하지는 않다. 처음부터 아예 여성 캐릭터 자체가 적다.
의미 있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좀 아쉽지만, 일본 만화 특유의 편협한 여성관이나 스토리와 관련 없는 자극적인 요소가 없으므로 다 큰 어른도 거북함을 느끼지 않고 볼 수 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이나 숱하게 등장하는 시체만 감안하면 말이다.
[아인]의 주인공 케이도 [데스노트]의 라이토처럼 똑똑하고 '이성적인' 학생이다. 하지만 라이토보다 훨씬 약하고, 인간적이고 그래서 현실적이다.
천재를 향한 극적인 묘사도 일본 만화 특유의 영웅주의와 같은 맥락이라 계속 보다 보면 좀 식상하다. 하지만 케이는 여러 똑똑이들 중에서도 [퀸스 갬빗]의 베스를 더 닮았다.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접고 다시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사람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뭐, 유머 코드도 별로 없고 좀 스토리가 좀 진지하기는 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화가 겪는 퀄리티 저하와 각색에 지쳤다면, [아인]은 여러모로 꽤 볼만하다.
1위. 고어해도 괜찮아, 귀여우니까 [도로헤도로]
피로한 일상에 무거운 스토리나 복잡한 음모는 부담스럽지만 마냥 유치하기만 한 애니메이션은 또 싫다면, 유머러스한 SF 액션 [도로헤도로]가 원픽이다. 술안주로는 역시 뻔하디 뻔한 권선징악도, 지긋지긋한 클리셰도 없이 팡팡 터지는 액션 어드벤처가 딱이지.
[도로헤도로]는 부조리의 유머를 제안한다. 작가가 상식과 고정관념이나 기대치를 뒤집어 놓는 게 취향인 듯하다. 악어 대가리를 한 주인공은 마냥 천진난만하고, 금발머리 니카이도는 짱 세다. 시작할 땐 분명 마법사는 나쁜 놈이라고 했는데, 막상 가서 보면 그냥 노력파 친구들이다. 게다가 얼마나 정도 많은지 모른다.
gore [명사] 피, 핏덩이, 살인, 살해, 폭력
피와 죽음은 무겁고 그로테스크하다. [도로헤도로]에는 진지함을 무너뜨리는 유머가 있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귀여움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캐릭터도 공들인 티가 나는 것이 하나하나가 다 입체적이다. 스토리뿐만 아니라 물리적 입체성도 갖췄다. 성인물 다운 육체미를 자랑하지만 절대 야하지 않다.
꼼꼼히 살펴보고 나면 원작 만화 작가가 여자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자 마음을 너무 잘 안달까.
카이만과 니카이도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도 '노오력'하면 악마가 될 수 있는 경계 넘기의 세계다. 마법과 죽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도전적인 넘나들기가 전개된다. 절대악이 없는 세계지만 악행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현실적인 어른의 세계다.
만화가 애니화 되면서 작화는 조금 단순해졌지만, 스펙터클은 잘 살려냈다. 반전에 반전이 숨은 미스터리 한 스토리도 아직까지는 원작과 다르지 않다. 다만 시즌이 한 개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좀 애가 타기는 한다.
넷플릭스가 워낙 대세인지라 일본 애니메이션도 대대적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다. 넷플 단독으로 스트리밍 하는 오리지널 시리즈도 적지 않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면 페티시다 싶은 전형적인 짧은 치마와 새다리로 무장한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지워나가다 보니 남는 게 많지 않아 선정하기 어렵지 않았다. 여성의 성애화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이지 싶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만이 갖는 감성이 있다. 특유의 평면성과 자유로운 상상의 범위에서 오는 독창성이다. 어렸을 땐 상상력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고 어른의 세계는 지극히 진지해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커서 보니 어릴 때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오늘도 디즈니에 환장하고 피카츄 인형을 사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