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통제 사이
나, 이제 어머니 전화 직접 안받을래.
시댁 이야기들은 당신 통해 소식 들을께.
그렇게 선언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나는 한동안 헷갈렸다.
시어머니의 관심과 정성은 참 따뜻하고 성실한 것이었기에,
내가 느끼는 이 묘한 불편함이 오히려 내가 못돼서 그런 건 아닐까 싶었다.
반찬을 건네주시고, 살림에 조언을 주시고,
아이를 돌보겠다며 애써주시는 그 모든 행동엔
분명 ‘사랑’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나는 그 마음을 받으면서도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감사해야 하는데, 자꾸만 불편하고,
미안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화가 났다.
오래 걸려서야 알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나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경계를 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도움’은 종종
상대방이 스스로 설 기회를 앗아간다.
그녀의 손길은 내가 내 방식대로 해볼 기회를 줄곧 앞질렀고,
그 호의는 내 감정을 자꾸만 뒤로 밀어냈다.
나는 자주 감정적으로 무력해졌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이 내게는 ‘경계 침범’으로 느껴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마다 경계는 다르고, 사랑의 언어도 다르다.
문제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언어만이 옳다고 믿을 때 벌어진다.
시어머니는 그녀 나름의 사랑을 건넸고,
나는 그 사랑 속에서
조금씩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 집의 주인이 나와 남편과 내 아이들이 아니라,
어머니와 남편인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집의 주인이 나와 남편과 내 아이들이 아니라,
어머니와 남편인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집의 주인이 나와 신랑이 아니라,
내가 어머니의 자녀로 편입된 것처럼 느껴졌다.
한 남자와 결혼하여 어엿한 성인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자녀로 ‘관리’ 받고, ‘보살핌’ 받아야만 하는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 구조 속에서 나는
한 가정의 중심이 아니라,
단지 ‘합류된 여자’, ‘동반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이 역시 내 품에서 자라기보다는
시어머니의 애정과 기준 아래 ‘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 집 안에서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새로 편입된 집에서 내가 신랑과 어머니를 잇는
어떤 '기능적 존재'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의 아들과 손주를 돌보는,
보모이자 대리인 같은 감정이 은근히 스며들었다.
그것은 참기 힘들 만큼 불편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늘 감정적으로는 바깥에 서 있었다.
함께 살고 있지만,
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조심스러웠다.
그 관계에서 내가 원한 것은
권력도, 주도권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나로서 인정받기를.
‘보호받아야 할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가족 안에서, 내 남편과 함께
어머니의 가정이 아닌 ‘우리의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끝내,
‘예민하다’, ‘지나치다’, ‘어머니 관심인데 그 정도는 받아줘야지’라는 말들 속에서
조용히 눌려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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