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부갈등의 심리학 : 이중 메시지, 수동 공격, 삼각화의 심리학
시어머니는 "너 살림하기 힘들지? 내가 김치 좀 해왔다" 라시며 반찬을 건넵니다.
며느리는 그것을 마뜩찮지만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히 받습니다.
남편은 “중립”이라며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요즘 반찬을 잘 안 먹더라. 입맛이 까다로운가 봐~”
며느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준 거 아직도 안 먹었니? 음식 맨날 사먹니?"
며느리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어머님은 왜 우리 밥상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거야?
나도 내 방식이 있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 서로를 우회해 표현되는 감정들.
이 장면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심리적 경계가 불분명한 관계에서 자주 반복되는 구조적 갈등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자신의 반찬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뭐, 그걸로 뭐라 했니?
그냥 힘들까 봐 반찬 좀 해준 건데,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
싫으면 싫다 진작 말하지, 넌 참 말을 어렵게 하네…”
이 말은 겉으로는 배려와 서운함을 담은 듯 들립니다.
그러나 다정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고 죄책감을 유도하는 말투죠.
듣는 사람은 불쾌하고, 억울하고, 말문이 막힙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나도 억울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럼 내가 진짜 예민한 사람이 되는 건가?
뭔가 이상한데, 콕 찝어 말할 수가 없네..
나를 위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안 느껴지니..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감정,
그게 바로 심리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개념
알 수 없는 의도인 이중 메시지(double bind)입니다.
“힘들까 봐 도와주려 했다”는 말은 다정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말을 어렵게 한다”는 말은
상대의 감정을 과장되고 부적절한 반응으로 평가절하합니다.
이중 메시지는 말과 말 사이의 모순,
혹은 말과 태도 사이의 불일치에서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면서
얼굴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는 시어머니.
또는 “난 괜찮아”라며 문을 세게 닫는 배우자.
"감사합니다" 라면서 표정은 별로인 며느리.
이처럼 겉으로는 괜찮다는데, 정작 그렇지 않은 감정이 흐를 때
상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고,
결국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혼란과 죄책감을 떠안게 됩니다
이처럼 표면적인 말은 긍정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거절, 비난, 통제가 함께 있을 때,
결국 감정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이때 듣는 이는
자신이 잘못 느낀 건 아닐까, 내가 너무 민감한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며
결국 자기 감정을 억누르게 됩니다.
이중 메시지 (double bind) 라는 이 개념은
영국 출신의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 언어학자, 그리고 사이버네틱스 이론가였던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가족 치료 이론에서 처음 제시한 것입니다.
그는 상반된 메시지가 동시에 한 사람에게 주어질 때,
수신자는 어느 쪽에도 명확히 반응할 수 없어
정서적 혼란과 심리적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때 이중 메시지가 조현병(schizophrenia)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조현병의 단독 원인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경험적 증거가 부족하고, 생물학적·유전적 요인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이후 정신의학계에서는 주요 정신 병인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 메시지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관계의 독성을 설명하는
유효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심리치료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 내 정서적 억압 구조와 심리적 경계의 혼란을 설명하는 데 있어
심리상담 및 가족 치료 현장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는 개념입니다
공격이 은근합니다.
그러니, 방어도 은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니,
공격받았다는 느낌조차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반박도, 방어도, 설명도 어렵습니다.
어머니의 은근한 침범에 불만 있는 며느리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침범이 논의될 수 없으니, 불만을 가질수도 없는 '금지된 항의'니까요.
모성애이자 관심이자 사랑이고, 정성인데 거기에 그 누가 정면으로 항의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진정한 모성애와 관심, 사랑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본 후,
관련 다시 개념을 재정립한 후에,
그것도 엄청난 '욕'을 먹을 큰 용기를 가진 소수만이 거기에 저항할 힘을 가질 수 있는 '용맹함'의 영역입니다. 천하의 못된 며느리이자, 불효막심한 자식에 천성이 '못된 여자' 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거든요.
이 모든 것을 무릎쓰긴 너무 위험하고 피곤합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불편함의 감정들' 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해명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모호하게 다른 사회적 긍정적 가치들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 어머니의 반찬을 냉장고 깊숙이 밀어넣고, 꺼내지 않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일부러 먹지 않기도 합니다.
물론 바빠서 그런 경우가 훨씬 많지요.
좀 더 용감한 분들은, 반찬을 버립니다.
'어머니, 보내지 마세요. 버릴거에요.' 라고 말하지 못하고,
'감사합니다' 라고 받아서, 먹지 않고 버리는 방법이 속 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수동 공격(passive-aggression)의 전형적인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말로 직접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못하니,
간접적인 행동으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자신의 거부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그것 말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정신분석가 칼 멘니거(Karl Menninger)는
수동 공격적 행동을
“직접적인 감정 표현이 억제된 문화적 조건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감정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갈등을 드러내는 것은 나쁘다는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돌려 말하고, 행동으로 흘려보내는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순종적인 것이 미덕이던 시절'
혹은 '자기 주장하면 욕먹던 시절' 자라왔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보내는 수동 공격은 어떤 모습일까요?
“요즘 애들은 참 똑똑하긴 해.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잖아~”
→ 겉으로는 칭찬처럼 들리지만, 실은 통제력을 잃은 기성세대의 불편함이 담긴 말입니다.
“나는 그냥 네가 힘들까 봐 반찬 좀 해준 건데, 그렇게 부담 느낄 줄은 몰랐네.”
→ 도움을 가장한 침범이며, 거절당한 뒤에는 상처받은 척하며 며느리의 반응을 ‘과잉’으로 몰아갑니다.
“아휴, 네 형님은 애 셋 키우면서도 살림을 얼마나 야무지게 하던데…”
→ 직접적인 비난 없이, 비교를 통해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방식입니다.
“나는 진짜 별 뜻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네.”
→ 자기 연민을 앞세워 며느리의 정당한 감정 표현을 죄책감으로 덮는 말입니다.
“너도 참 생각이 깊구나~ 나는 그냥 옛날 사람이라 이런 건 좀 어렵네.”
→ 인정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신의 기준이 옳다고 암시하며, 은근히 상대의 방식을 평가합니다.
(행동) 말을 하지 않고 한숨만 쉰다, 눈을 굴린다, 식사 중 말없이 수저를 탁 놓는다.
→ 말 대신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비언어적 수동 공격입니다.
이렇듯 수동 공격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냥 뜻없이 던진 말들이나 농담 같지만,
관계에 보이지 않는 전류를 흐르게 합니다.
상대는 그 감정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 더 고립되고,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악화됩니다.
다정한 말투, 애매한 표정, 약간의 억울함과 자기연민.
이 모든 것이 모여, 며느리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자기 의심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등불엔 문제가 없어. 당신이 예민한거야' 라는 '가스라이팅' 의 핵심 기제이지요.
슬픈 사실은, 그 가스라이팅의 가장 심각한 피해자가
그 시대에 그 문화를 감내하며 희생했던 시어머니들이라는 점입니다.
희생자들이 가해자로 다시 나타나는 이 사회적 구조는 언제까지 반복될까요.
우리대에서 끊을 수는 없을까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갈등이 생겨도, 서로에게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편을 매개로 감정을 주고받습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진짜 별뜻 없이 한 건데,
며느리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니까.
넌 중간에서 좀 잘 얘기해봐.”
며느리 역시 남편에게 하소연합니다.
“당신 엄마, 자꾸 반찬 주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간섭하는 거 진짜 힘들어.
좀 말 좀 해줘.”
이처럼 갈등의 당사자들은 서로를 직접 마주하지 않고,
남편이라는 제3자를 통해 감정을 흘려보냅니다.
중간에 남편은 죽을 지경입니다.
한 명은 어머니, 다른 한 명은 아내,
둘 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이서 왜 이러는 걸까요?
왜 둘의 문제를 본인에게 가져와서 해결해달라 하는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이 구조를 심리학에서는 삼각화(triangulation)라고 부릅니다.
이는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s Theory)의 창시자
*머리얼 보웬(Murray Bowen)이 설명한 핵심 개념입니다.
보웬에 따르면,
감정적 긴장이 높아질 때 사람들은 직접 충돌을 피하려 하고,
대신 제3자를 끌어들여 감정을 분산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방식이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감정은 분산되지만, 책임도 함께 분산되고,
정서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끼리의 직접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애매하고 고착된 채로 남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아무리 직접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남편이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아들의 자리’에 머무른 채,
그저 중간에서 중립을 지키려 한다면,
갈등은 결코 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의 핵심 고리는 ‘한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며느리에게는 남편이고,
시어머니에게는 아들입니다.
정확히 아프게 정곡을 찌르자면 '남편 역할을 하는 아들입니다'
어쩌다가 그가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지는 사연이 아주 복잡합니다.
문제는 아들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부재를 메꾸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인식이 잘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 '모성애' 라는 포장 때문에요.
그러나 진정한 모성애는 '고부갈등' 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고부갈등은 두 여자의 '역할충돌'에서 오거든요.
어머니와 아내의 자리가 겹치지 않는다면, 발생하지 않는 충돌입니다.
누군가는 자기 자리의 선을 넘어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남편은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내로 선이 명확할지 모르지만,
정서적인 성향이 강한 여성들은 조금 다릅니다.
한 남자를 자신의 정서적 파트너로 두고 있다면 육체관계와 상관없이 삼각관계가 형성됩니다.
남편은 이 삼각 구조를 형성한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그녀들이 질투심이나 독점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편이 누구에게도 선명하게 정서적 경계를 설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부갈등에서 남편의 중립이 문제를 크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여성 사이에서
겉으로는 다정한 듯, 속으로는 억눌린 감정이 고요히 흘러가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은근한 감정의 충돌 때문에,
중간에 낀 남편들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죠.
“이건 그냥 여자들끼리의 문제야.”
"여자들은 진짜 피곤해. 대충 넘어가면 안돼? 그게 뭐라고"
“둘이 좀 알아서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입니다.
누구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직접적으로 싸우지도 않으며,
서로의 호의 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만 조용히 쌓여가니까요.
그런데 이 전쟁이 고약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당사자들조차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의도적으로 아들을 대리남편 삼으려는 것도 아니고,
며느리는 명확히 “내 경계가 침범당했다”고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어딘가 기분이 나쁘고 억울한 상태에 머무릅니다.
반찬을 받는 게 왜 이렇게 불편한지,
전화 한 통이 왜 이렇게 지치는지,
감정의 본질을 잘 모른 채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만 남습니다.
어쩌다 그들은 이런 말하기를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이건 성격이나 개인의 미성숙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문화적 규범의 틀 때문입니다.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
“감정을 드러내면 이기적인 사람이다.”
“조화를 깨지 말아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어온 여성들은
등을 드러내기보다 감추고 누르는 법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거나, 눈치 보듯 암시하고,
상대가 스스로 ‘알아차려 주길’ 바라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렇게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쌓이고, 굳고, 엉켜서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해와 피로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처럼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내면에서 곪고, 몸에까지 남은 결과가
우리 사회에 하나의 병명으로까지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만 있다는 독특한 병명,
바로 **‘화병(火病, Hwabyeong)’**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 문화적 질병은,
억눌린 감정, 말하지 못한 분노, 책임지지 않은 슬픔이
가슴에 맺혀 병이 되는 구조적 현실을 드러냅니다.
이 병은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솔직히 말할 수 없는 문화,
조용히 참고 넘겨야 했던 관계 속 위치,
그리고 말을 꺼내는 순간 ‘나쁜 사람’이 되는 구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이 돌려 말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고,
그 말들이 마음에만 머물다 몸에까지 새겨지게 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진정으로 이해하되,
한 인간으로 나쁘다 평가하는 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를 진정으로 비난 없이 이해한다고 해도,
그 다음 매듭을 위해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왜곡 없이, 그리고 억누름 없이,
우리 자신의 감정들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딸이나 며느리, 아들, 자녀, 시어머니, 남편이라는
역할 이름에 한정된 왜곡된 역할에서 벗어나 봅시다.
진정 사회의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의 진정한 책임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책임감과 죄책감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운명일까요?
아니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과 선택일까요?
다음 화:
《나의 진짜 책임은 누구인가, 내가 올바로 향해야 할 죄책감은 어느쪽인가 – 감정의 주인으로 선다는 것》에 대해서 더 깊게 나누어 갑니다. 남편이 '한 가정의 가장' 으로서 서 있어야 할 자리와 그 이유들에 대해 더 깊게 이야기해봅니다.
#고부갈등
#시댁스트레스
#시어머니와며느리
#중간에낀남편
#남편의역할
#감정적유착
#감정의경계
#어른이된다는것
#심리적성장
#가족관계의심리
#정서적책임
#성숙한관계
#심리학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