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침범, 금지된 항의
아내가 내 어머니와 미묘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남편인 자신에게 왜 서운해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이런 장면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직장에서 남편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상사가 있어요.
보고 방식부터 퇴근 시간까지 하나하나 참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은근히 “넌 무능하다”는 뉘앙스로 깎아내리죠.
내 판단도, 자율성도 무시당하고,
직장생활에서의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에게 또 깨지고, 다른 일도 꼬여 엉망이 된 하루.
퇴근길, 남편이 말합니다.
“진짜 스트레스야.
그 부장이 자꾸 시비 걸고,
별것도 아닌 일로 날 여러 사람 앞에서 깎아내려.”
그런데 나를 위로해줄 줄 알았던 아내가 이렇게 말해요.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그래도 당신 상사잖아. 경험도 많고 사람 보는 눈이 있겠지.
당신이 진짜 일을 좀 못하는 거 아냐?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잘 배운다고 생각해.
다 당신 잘되라고 당신 위해서 그런 걸거야”
그 순간, 남편은 상사보다
아내의 말에 더 화가 납니다.
가장 내 편일 거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어이없는 말이 돌아왔기 때문이지요.
억울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뭔 소리야? 당신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대하는지 알기나 해?”
그러자 아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죠.
“뭐야,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그 상사가 당신보고 오죽 답답했으면 그러겠어.
사회생활 그렇게 예민하게 하면 안 돼. 그냥 대충 넘겨.”
그 상사를 ‘시어머니’로, 직장생활을 ‘가정생활’로,
그리고 가뜩이나 힘든 데 오히려 그 사람 편들어
열받는 나를 ‘아내’로 바꿔보면
왜 아내가 서운해하는지 감이 오시려나요?
남편에게는 평생을 보아온 어머니라
내 엄마는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자식인 내게 베풀었던 따스한 태도를
본인 자식이 아닌 나의 아내에게도 똑같이 보인다고 넘겨짚으면 안 됩니다.
물론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니 따뜻하게 대하시죠.
하지만 그 애정의 온도, 행동의 뉘앙스,
심지어 그 따뜻함을 베푸는 목적조차도 처음부터 다르거든요.
그리고, 전 편에서 봤듯이 남한테는 따스하셔도
'내 아들을 앗아간 며느리' 라는 무의식적 기제가 발동하면
묘하게 나의 아내와 신경전을 벌이기 쉽습니다.
이 점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남편 입장에서는 아내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내는 ‘사랑받고 있다’, ‘내 편이 되어준다’,
‘감정적으로 함께 있다’는 느낌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습니다.
그래서 상대와 그 감정이 단절되는 순간,
존재 자체가 밀려난 듯한 외로움과 상실감을 겪게 되는 겁니다.
남편은 이 고통을 가늠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남편에게는 익숙한 감정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들어?”,
“그냥 고맙게 받으면 되잖아, 우리 엄마가 신경써주시는데 ”라는 말이
무심코 나오는 것이겠지요.
아내가 괴로운 건
시어머니 김치 한 통, 반찬들 때문이 아닙니다.
전화나 잔소리 때문도 아니에요.
감정적으로 남편에게서 멀어진 자리,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남편으로부터의 정서적 고립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악독 시어머니라도 남편이 자기 편이면
상관없이 깨쏟으며 사는 집들이 많아요.
<폭싹 속았수다> 의 관식이 애순이 부부처럼요.
“그냥 반찬 고맙게 받으면 되잖아.”
“우리 엄마가 신경 써서 챙겨주는 건데, 왜 예민하게 굴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말문이 막힙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별문제가 없어 보이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은 매번 상하고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반복됩니다.
사실, 시어머니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어요.
단, 남편이 내 수고를 알아주고,
내 감정에 공감해준다면 말이죠.
문제는 남편의 감정이
더 이상 아내에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먼저 헤아리고,
심지어 아내를 불편하게 하는 그 사람의 편을 들어줄 때—
아내는 감정적으로 외면당했다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직장에서 매번 자신을 무시하는 상사의 편을
아내가 든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억울함과 외로움, 바로 그 감정입니다.
남편이 어머니의 감정엔 유난히 민감하지만,
아내의 고통엔 무심해 보입니다.
어머니가 섭섭해하면 달래고,
아내가 힘들다고 하면
“좀 넘겨”, “예민하게 굴지 마”라며 축소시킵니다.
그 순간, 아내는 느낍니다.
“이 사람은 감정적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구나.
나를 보호할 생각이 없구나.
내 감정은 이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구나.”
같이 밥을 먹고,
아이까지 함께 키우는 사이라 해도,
그는 더 이상 감정적으로 나의 남편이 아닙니다.
서운하다고 말하면 “예민하다” 하고,
불편하다고 하면 “네가 참아야지”라는 사람.
그를 보며 아내는 문득 깨닫습니다.
“그럼 난 누구와 결혼한 거지?
그는 지금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를 지키고 있는 거지?
나는 이 집의 들러리인가?
왜 나는 조강지처가 아니라,
버림받은 첩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이 지점이 바로 아내들의 감정 핵심입니다.
아내가 괴로운 이유는,
예민해서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 누려야 할 결혼 생활에
‘강력한 제3자’가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기에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미안하고,
싫다 말하기도 죄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점점 더
‘역할’과 ‘기능’만을 수행하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불쾌한 감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감정적 삼각관계는
아내를 점점 외롭고 고립되게 만듭니다.
마치 안방을
남편과 다른 여자와 셋이 함께 쓰는 기분이죠.
실제로 외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남편의 정서는 이미 다른 사람과 공유되고 있는 듯한 위화감.
이 묘한 불쾌함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아내를 혼란스럽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이상하다고 대놓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성애' 에 누가 항의를 하나요.
남편도 길길이 뛸 것이 분명하고 나만 못된 아내이자 며느리가 될 게 뻔한
금지된 항의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은 나의 아내 혼자만 겪는 이상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미 가족치료, 정신분석, 상담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되어 온 사회적·심리적 문제입니다.
단지, 한국 사회에서 유독
“어머니들은 원래 그래”
“예민하게 굴지 마”라는 말로
쉽게 덮여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민한 아내”, “섭섭한 며느리”라고 부르는 이 감정—
사실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문화적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정서적 고립과 침범의 문제입니다.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이런 갈등이
‘가족 내에서 흔히 있는 일’로 축소되거나
‘효’라는 이름 아래 감춰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서구의 심리학과 가족상담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구조적 문제로 주목되어 왔습니다.
아내가 겪는 이 고통은 결코 예민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단순히 ‘예민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가스라이팅의 일종일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에서는 육체적 접촉 없이,
감정적으로 배우자 아닌 사람과 깊은 유대를 맺는 관계를
‘정서적 외도’ 또는 ‘감정적 외도’(emorional affair) 라고 부릅니다.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고, 고민을 나누고, 위로받으며
점점 더 감정의 중심이 배우자가 아닌 제3자로 이동하는 관계죠.
일부 전문가들은 이처럼 감정의 밀도가 높고,
배우자와의 정서적 결속을 심각하게 깨뜨리는 경우
이를 ‘정서적 간통(emotional affair)’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조금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용어들이지요.
더 충격적인 것은 이 구조가 가족 내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부모-자식 관계, 특히 어머니와 아들의 유착 관계에서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고부갈등이 있으신가요?
보통의 경우 아들과 어머니의 이 정서적인 부분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또한 심리 상담학에서는 이 구조를 다른 말로
‘정서적 배우자(emotional spouse)’ 또는
‘대리 배우자(surrogate spouse)’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정서적 결핍을
자녀에게 ‘배우자처럼’ 기대하며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이지요.
이때 자녀는 부모의 감정과 욕구를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되고,
정작 자신의 삶과 관계에서는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지거나
진짜 배우자(아내)에겐 연결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남편이 어머니의 감정엔 과도하게 반응하면서,
아내의 감정엔 무심하거나 차갑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어머니의 침범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남편이 자신을 감정적으로 지켜주지 않는 데 대한 실망은
단순한 과민 반응이나 트집 잡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지키려는 건강한 감정 반응이며,
가족 안에서 존중받지 못한 관계 구조에 대한 내면의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을 표현할수록
“시어머니를 밀어낸다”,
“효를 모른다”는 식으로 오해받게 되며,
아내는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과 자기검열 속에 갇히게 됩니다.
말로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고통.
그것이 바로,
“정서적으로 나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한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시어머니의 잦은 전화, 반찬 전달, 살림 조언은
표면적으로는 도움이고, 배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내는 자신의 공간이 조금씩 잠식되고 있다는 감각을 이미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경계 침범(boundary violation)’ 혹은 ‘역할 혼동(role confusion)’이라 부릅니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자율성과 감정적 공간을 존중할 때 유지됩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댁의 개입은
이 경계를 점점 흐릿하게 만들고,
결국 아내를 부부의 삶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그래서 김치 한 통, 잔소리 한 마디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미묘하고 지속적인 ‘경계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잦은 안부 전화와 반찬에 담긴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나는 아직 이 집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 아들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이 두 가지가 아내를 더욱 괴롭게 만듭니다.
"내 엄마니까, 너는 그냥 이해해줘."
이 평범한 말 한마디 뒤에 자기 세계를 방기하는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시어머니는 아내에게 ‘낯선 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함께 시간을 쌓아온 친구나
인간대 인간의 선택적 관계가 아닌,
어쩌면 직장 상사와도 비슷한 위계 안에 놓인 관계일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내 삶 깊숙이 개입할수록,
아내는 점점 고립감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내가 정한 살림의 방식, 생활의 규칙, 감정의 흐름이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한 감각.
그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닙니다.
그건, 존재의 침식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아내는 늘 고맙다고 말해야 합니다.
자신이 요청한 것이 아닌 도움에도 말이지요.
애써 웃으며 시어머니 전화를 받고,
정성껏 싸주신 김치에 고개를 숙입니다.
시어머니가 아닌, 남편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합니다.
남편이 사랑스러우면,
불편해도 기꺼이 감내하려 합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내 감정을 설명하지 않게 되었지?”
"내 감정은 도대체 누가 알아주지? 난 이 가정에서 밥하는 사람인가?"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말합니다.
사람이 타인의 기대에 맞춰 자신을 억누르고
겉으로만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갈 때,
그는 점점 ‘가짜 자아(False Self)’가 된다고요.
아내는 이제
‘좋은 며느리’, ‘예의 바른 아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진짜 감정을 감추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살수록 자기 자신은 점점 사라지고,
남편은 ‘남의 편’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정서적으로도 멀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감정의 시선이 내 남편이 아닌 자식이나,
그 너머 어딘가를 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의 시어머니가 그러했듯이요.
잃어버린 ‘자기 자리’를
이제는 아이들의 가정에서 다시 찾아보려 하는 거죠.
그 반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자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아내들은 사소한 것에 예민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역할을 침범당하고,
감정적으로 배제된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감정이 단절된 관계에서는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살아도 혼자라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벽 앞에 서 있는 기분.
그래서 아내는 점점 말하지 않게 되고,
표정은 사라지고, ‘괜찮은 척’하는 연기를 시작합니다.
혹은, 화로 가득한 언어로 신호를 보낼지도 모르죠.
신경질이 나서 남편 속을 박박 긁는 피곤한 여자가 됩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속마음을 묻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 예민하냐”고만 하지요.
아내는 묻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인데,
왜 내 감정은 늘 제3자 취급을 받아야 하나요?”
“왜 내 자리는, 내 허락도 없이 침범당해도 되는 건가요?
그러고도 부당하게 금지를 하면 못된 여자로 치부되는 건가요?”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침범도, 배제도, 고립도 겉으론 아무 일 아닌 듯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감정의 구조 속에서
아내는 오늘도 조용히, 혼자 무너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때 ‘든든한 내 남자’였던 남편이
이제는 시어머니의 ‘큰아들’처럼 느껴진다며,
혼잣말로 자조하듯 중얼거리면서요.
아내가 괴로워도, 정서적으로 고립되어가도
“우리 엄마가 좋아하시니 됐잖아”라며 넘기는 그 태도는
정말 가족 전체를 위한 사랑일까요?
소외된 또 다른 내가 선택한 한여자인 아내의 감정은
누가 함께해주고, 누가 지켜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 나는
누구의 감정에 더 책임이 있는 사람일까요?
어머니일까요, 아내일까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의 선택과 운명, 그리고 진정한 어른의 책임.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자리를 되찾고 회복하는 여정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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