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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그럼 우리 엄마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고부갈등과 골든차일드, 그리고 중립이라는 환상

by 파랑새의숲

버티다 못한 아내가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말이 역시 곱게 잘 나가지지는 않죠.


“당신은 왜 시어머니 말씀에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내 말만 그렇게 무시해?”


아, 남편 입장은 정말 곤란합니다.

아내와 어머니가 둘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 것 같고 말입니다.

중간에 내가 나서 무어라 해야 하나?

영 모르겠어서 나름 힘들게 중립을 지키는데

아내의 또는 어머니의 애꿎은 화살이 날아듭니다.

제발 저 둘이 알콩 달콩 사이좋게 지내주면 좋으련만

그게 그렇게나 힘든 걸까요?

정말 난처하고 속 시끄럽죠.

게다가 이슈들도 자기가 보기엔 별 거 아닌 거 같아 보입니다.
“아니, 그럼… 우리 엄마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당신이 좀 예민한거 아냐? 그냥 좀 가볍게 넘겨."

"반찬 매번 주시면 당신도 편하고 좋지 않아?"

"우리 엄마가 당신 신경써주시느라 그러는 건데.. 왜 그 맘을 몰라?"

"뭐가 이리 복잡하고 예민해? 골치아퍼 아몰라.“



이 말은 아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서럽습니다.

남편이 '남의 편' 이 되는 순간이며,

아내가 영원히 남편에게 등돌리게 될 수도 있는

부부애를 해치는 위험한 순간입니다.

아내들이 결혼 자체를 무르고 싶을 정도로 강력한

남편들의 무심한 일명 ‘중립’의 태도 속에는,

사실, 그 남자 안에 지워지지 않는 무의식의 명령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좋은 아들이 되어야 한다” 또는

“나는 불쌍한 엄마를 거스르면 안된다"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은 나의 책임이다" 라는

아주 뼈아프고 오래된, 그들 인생 전체에 새겨진 각인 말이죠.


유교문화와 ‘효’라는 명령


유교문화는 오랜 세월, 가족을 위계로 조직해왔습니다.
그 위계 안에서 부모에 대한 절대적 효도는 삶의 덕목이었고,
특히 ‘장남’ 또는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받은 아이에게는

가문을 잇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운명이 주어졌죠.

결코 공짜로 받는 사랑과 관심, 대우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는 부모 봉양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가 투자한 비용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부나 그 무엇을 최선을 다해 성과를 올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실망시키게 되니까요.

여자에게 '사랑받는 것' 이 중요하듯,

남자에게 '인정받는 것' 은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사랑과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무거운 책임.
하지만 그것은 종종 ‘자기 삶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버거운 사랑’ 이었습니다.


남아선호사상과 선택적 사랑, 편애


게다가 딸과 아들의 역할은 애초부터 다르게 주어졌죠.
딸은 집안일과 양보의 대상이 되었고,
아들은 기대와 투자의 중심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무뚝뚝하고 부재중이던 아버지 대신,

엄마의 정서적 역할을 하는 '미니 남편' 노릇도 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들이 더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사랑은 조건이 붙은 기대였고,
때로는 부모의 감정을 책임져야 하는

심리적 대리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이 구조가 꼭 남녀로 구분되지는 않는데,

나를 빛내줄 수 있는 자식 vs. 집중이 덜 되는 자식

이렇게 성별에 상관없이 나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족 안에는
한쪽은 골든차일드(빛나는 자식),
다른 한쪽은 스케이프고트(희생양, 못난자식)라는
극단적으로 다른 역할이 생겨나기도 하고,

요즘에는 아이를 하나 둘밖에 안 낳으니

그 아이 자체로 골든 차일드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골든차일드라는 감옥


골든차일드(Golden Child) 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팔자좋은 아이들, 가족 내 강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사랑은 조건부 사랑입니다.

네가 뭘 못 하더라도,

부모인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도 괜찮아 라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닙니다.


“너는 잘해야 해”,
“엄마 아빠 기대를 저버리면 안 돼”

"뭐든 성과를 내야해" 라는
심리적 부채와 죄책감의 궤도 위에서 유지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가 됩니다.


“엄마가 너 낳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 하나만 믿고 살았어”

"니 아빠 정말 짜증나, 너 보고 산다"
“다 너 잘 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이렇게 잘하니 엄마는 너무 좋고 자랑스럽다"


이 말들은 언뜻 사랑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넌 내 감정과 기대를 책임져야 해”라는
무의식의 고지서에 가깝습니다.


죄책감이라는 교육된 감정


그들은 압니다.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키웠는지.

자신들이 한 여자의 삶을 담보로 커왔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한켠에 부채감을 가득 안고 삽니다.


속썩이는 남편, 구박하는 시어머니,

게다가 사회적 약자로서의 억울함을 모두 견디며

자기 하나만 바라보고 억척스럽고 힘겹게 살아온 한 여자의 일대기를, 어머니께 거의 평생 들어왔죠.

그 싦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떨쳐버리고 싶어도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자식을 찍어누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 본심과 감정을 말하기 어려워요.

그들은 다른 사람 인생의 희생을 담보로

지금 자기 삶이 이루어져 편히 살고 있는,

어머니께 ‘빚쟁이' 같은 죄스러운 느낌을

무의식중에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좀... ' 하면 버럭하나요? 그게 그 증거입니다.


죄책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가스라이팅일까?


우리는 흔히 ‘죄책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는

죄책감은 본능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 속에서 학습된 감정이라고 봅니다.
특히 부모의 감정과 기대, 사회의 가치들을 내면화한 결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죄책감(Golden child guilt)'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왜 그렇게 뿌리 깊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

유명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가들의 대표적 이론을 몇 개 살펴볼까요?


-앨리스 밀러 (Alice Miller) : 정신분석가, 심리치료자

저서: 『상처받은 아이의 살아남기(The Drama of the Gifted Child)』

밀러는 “착한 아이”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을 분석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분노와 좌절 같은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거짓 자아를 형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 욕망을 표현할 때마다,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제동장치를 작동시키지요.


-도널드 위니컷 (Donald Winnicott): 소아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대상관계이론

개념: 거짓 자아(false self),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

위니컷은 감정 표현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아이는
타인의 기대에 맞춰 자기를 숨기게 되며,
‘진짜 나’보다 ‘타인에게 맞춰진 나’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이기적이다’, ‘불효다’라는 죄책감과 연결시키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 사회심리학자, 정신분석가, 철학자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은 죄책감을 ‘내면화된 권위자의 목소리’,
즉 부모나 사회의 기대를 자기 내부로 들여온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죄책감은 외부의 규범을 내면에 이식한 결과이며,
자율성과 분리를 방해하는 심리적 족쇄로 작동합니다.

덧붙여 그는 죄책감이란,

자유에 따르는 불안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감정적 회피 장치이기도 하다고 봐요.


요약하자면:

죄책감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받기 위한 전략이자, 통제와 순응을 유도하는 교육된 감정이지요.

과거 집단주의 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하던

사회의 틀을 쉽게 유지해주는 기본 기능이기도 하지만,
자기 삶을 살고 싶을수록, 그 감정은 벽이 됩니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내 감정’이 아니라 ‘내면화된 타인의 감정’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모른채,

자라나는 환경에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잔뜩 끌어안은 상처로 가득한 그들은

자신들이 인생을 빚졌다 생각하는 어머니에게

온전히 자기주장을 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이기적인 건 아닐까”
“엄마가 상처받을 거야”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되는 거야”


라는 내면의 검열과 죄책감이 자동 반사처럼 작동합니다.

이것은 흔히 ‘Golden Child Guilt'
즉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온 아이가 느끼는 무의식적 죄책감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은 결코 '내 것'이 아닌 가스라이팅의 결과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아직,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힘들게 '중립'을 지킵니다.


사춘기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았던 아이들


원래 사춘기는 부모에게 “싫어”, “내 방식대로 할래”라고 말하며 감정적 독립을 연습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많은 골든차일드는
이 시기를 제대로 겪지 못하거나, 억눌린 채 지나가지요.

어떤 부모들은 아이의 사춘기를
“버릇없음” 혹은 “비효율”로 치부합니다.


“나는 너 위해 다 참고 희생했는데…”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이의 부정과 감정 표현을 막기 위해서

더욱 화내거나 아이가 달라졌다며 슬퍼합니다.

부모가 불쌍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슬퍼하고 괴로워하면 할수록,

아이는 자기 표현을 제대로 건강하게 하지 못합니다.


결국 아이는 사춘기 때 이루어야 할 필수 과업인 '정서적 분리', 를 실패합니다.

엄마의 감정은 나의 것이 아니고 엄마의 것이며, 그 감정의 책임은 본인이 아닌 엄마라는 것.

나는 당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지대로 하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강한 자아분리를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모와 감정적으로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채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기 책임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에도,
아내의 감정과 엄마의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 앞에서
“중립”이라는 방어막 뒤에 숨게 되지요.

사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일단 그 부정적인 감정들과 갈등을 피하고 숨고 싶거든요.

아프고 힘들고 지치니까요.



그 말은 회피나 무시가 아니라, 고백이다


“아니, 그럼 우리 엄마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 말은 종종 회피나, 아내의 감정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실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의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자기 감정과 욕구보다
‘엄마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


늘 ‘좋은 아들’이어야 했고,
‘엄마를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명령 속에 살아온 사람.

그는 지금 남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들이기도 하다면서,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하냐며 옴짝달싹하지 못하지요.

자신이 어느 쪽으로라도 편을 들어 움직이는 순간,
이 아슬아슬한 삼각관계에
불화살이 날아들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그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애써 회피하며

상황을 자신이 진정시키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정지 상태는 결코 중립이 아닙니다.

그는 그 자리에 애매하게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머무름으로써,

혹은 자신이 지켜야 할 아내를 오히려 억누름으로써,
결국 양쪽 모두에게 무언의 불화살을 당기고 있는 중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도,
누군가의 아들’로서만 존재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진짜 ‘아들’과 ‘남편’의 역할을
아직 정확히 분별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사회로부터

'어머니의 남편 대리자' 역할까지 해야만 착한 아들이라고 학습되었거든요.


그런데, 왜 남편은 그렇게 믿고 있을까요?

어쩌다가 그 아들은,

마땅히 아버지가 해야 했던 남편 역할까지 짊어지고서는

자기 책임도 아닌 어머니의 인생 전체를,

아들된 자기의 책임이라 믿는 걸까요?

지금이라도 자유로울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다음 화 예고
“죄책감에서 깨어난다는 것 – 사랑과 효도의 경계를 다시 그리다”

죄책감 뒤에 숨은 ‘중립’이라는 이름의 회피가 아니라,
나와 우리 부부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으로.
‘거짓된 아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진짜 아들’로, 그리고 성숙한 남편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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