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만난 다정한 안전기지
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결코 잊지 않는다.
— 마야 안젤루, 미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나는 그 말이 항상 언제나 진실일 거라 믿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의심을 품어왔다는 것을,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낯선 타인의 호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러는 걸까
뭘 바라길래 이렇게 , 도대체 왜 잘해주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 나의 느낌과 감각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으니, 혹여라도 있을 나쁜 사람들을 걸러내기가 힘들었다. 진심으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까지 의심해야만 내가 조금이라도 있을 위험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낯선 나라, 낯선 언어 속에서도
내게 가장 깊게 다가온 건 다정한 사람들의 손길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별 관심 없어하는 냉담한 사람도 있었고,
길에서 성희롱하며 쫓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을 내 직감으로 걸러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다.
만나는 이들의 작은 호의, 따뜻한 눈길, 도움을 주려는 손길들이 모여, 나의 두려움을 감싸 안고 이야기해 주었다.
세상은 , 사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정하다고.
어쩌면 오히려 나를 품어주는 안전기지일지도 모른다고.
막무가내 여행을 시작한 후로
여러 도시를 거치면서 그렇게
세상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터키 부르사의 시골 마음, 어떤 외딴 기념관을 찾았을 때,
안내인은 나를 보며 수줍게 이야기했다.
“제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데,
그래도 설명 들어보시겠어요?”
1인 개인 투어를 공짜로 받는 값진 기회.
박물관 구석구석을 설명해 주던 그녀의 태도 속에서,
나는 능숙한 언어보다 더 깊은 성의를 느꼈다.
서툴러도 진심은 전해지고,
그 진심은 낯선 이의 마음까지 움직인다는 걸
경험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날,
인적 없는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 멈춰 선 한 대의 차.
거의 폐차 직전의 차에 꽤 많은 인원이 타고 있었다.
그 터키 가족은 막 사 온 아침 빵을 내게 내밀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지만, 내게 그 빵을 맛보라는 것 같았다.
내가 빵을 한입 베어 무는 모습을
너무도 흐뭇하게 지켜보던 그들의 눈빛 속에는
낯선 이를 향한 경계보다 먼저 자리한 따뜻한 환대가 있었다.
내가 뭔가를 먹는 것을 이렇게 사랑스럽게 봐준 이가,
엄마 아빠 외에 또 있었던가.
나는 그들에게서 부모 앞에서 첫 발자국을 뗀 아기로 다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터키어를 못하는 내게,
원하는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예약해 주며,
혹시나 타지에서 말이 안 통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를 적어준 사람도 있었다.
부르사의 한 가족은,
나를 그들의 아들과의 저녁시간에 나를 초대했다.
아들의 학교 숙제 '연 만들기'를 도와주며
아이에게 이런 힘든 숙제를 내다니, 학교는 정말 귀찮다니까 툴툴대는 그를 보며 이곳도 엄마 아빠들은 별 수 없구나
헛웃음을 내며 그들의 따뜻한 모습을 바라봤다.
그 경험은 내가 여행자가 아니라 오랜 이웃으로 그들의 세계에 받아들여진 듯한 환대를 느끼게 했다.
또 어느 날, 그 동네의 가장 유명한 유적지를 둘러보러 갔을 때, 그곳의 유적 관리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잠깐, 이리 따라와 봐.”
나는 나 혼자라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는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다 그의 따뜻한 눈빛을 믿고 따라 들어갔다.
그는 내게 꽁꽁 숨겨온 비밀이라도 공개하듯,
통제된 구역을 살짝 열어주었다.
찬란한 옥색 빛으로 가득한 형형색색의 돔
그 자미 안의 유적 모자이크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넋이 나가 감탄하는 내게 그는 싱글벙글 이야기했다.
"진짜 예쁘지?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이거 손상될까 봐 일반인에게 개방 안 되는 거거든.
이 고대의 옥빛 색깔 타일을 지금은 똑같이 만들 수가 없대."
놀라며 감탄하는 내 표정에서 그가 더 행복해하던 얼굴에서
나는 잠깐이라도 낯선 타국의 남자를 오해한 것에 대해 너무 미안했다.
어느 날은 지역 버스기사의 고함 속에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영어를 쓰며 호텔 이름을 묻는 내게,
“이 나라에서는 이 나라 말을 쓰라고!!! “
라며 가르치는 것 같이 낯선 그 나라 말로 화내며 몰아붙이는 버스 기사 앞에서
나는 내릴 곳조차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쩌지, 호텔을 못 찾으면 나 오늘은 길에서 자야 하나..
근데 도대체 어디서 내려야 하나, 넋이 나가 있을 때였다.
그때, 한 청년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넌 나 내린 다음 다다음 역에서 내리면 돼.
거기서 길 건너면 네가 찾는 호텔이 있어.”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순간은 낯선 땅에서의 두려움을 단번에 덮어준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버스에 오르면
크게 내 목적지부터 현지말로 외치는 버릇이 생겼다.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버스 안은 작은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지켜보다가, 내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이면,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여기야, 여기서 내려요!” 하고 알려주곤 했다.
그 광경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다.
낯선 땅에서조차,
사람들은 기꺼이 나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들의 진심 어린 호의는
단지 여행의 한 장면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끊임없이 품어줄 수 있다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단순한 친절의 기억을 넘어
세상에 대한 나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낯설고, 언어는 다르지만
마음이 전하려는 뜻은 언제나 같았다.
그들의 눈빛과 손길 속에서
나는 세상이 결코
위험만 가득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믿음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신뢰로도 번져갔다.
‘나는 혼자서도 괜찮다.
낯선 세상 속에서도 안전하다.
필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호의가 손을 내밀어줄 것이다.’
갑자기 여행 첫날, 버스에서 만났던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가보고 싶은 곳은 꼭 가봐, 그 이유가 있을 거야.
언제나 너 자신을 믿고. 그러면 신도 도울 거야.
어쩌면 신은
그 사람들 모두에게 깃들어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신뢰와 안전기지가 내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자,
이제는 단순히 살아남는 여행이 아니라,
세상을 탐험하고 싶은 마음,
모험하고 싶은 열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은 더 이상 두려운 낯선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내가 알지 못한 수많은 길과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굉장히 신나는 곳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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