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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강 Mar 03. 2019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비록 퇴근 후 곱창에 소주는 없지만"

유럽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먹었던 저녁 식사 @청파동


정신없는 일주일이었다. 장기 출장을 다녀오니 이전까지 미뤄놓은 회의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타 부서 직원들은 출장에서 얻은 내용들을 공유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윗 선에서는 2019년도 프로젝트를 바로 시작하기를 요구했다. 출근을 하면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back-to-back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이어지는) 미팅에 참석해야 했고, 겨우 시간을 내어서 서류들을 작성하려고 하면 후임이 와서 질문공세를 던지거나 다른 동료들이 잠시 대화를 하자며 보채곤 했다. 이러다가 정작 필요한 업무를 하나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우선순위를 작성한 뒤 그 순위에 들지 못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겨우 나만의 시간을 구하여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장소에 숨어서 서류들을 작성했다.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아마존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마치 내가 PM인지 작가인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로 글을 적었다.


이렇게 쓰면 안 돼. 처음부터 새로 작성해야겠는데?

어떻게 보면 지금 당장 필자에게 가장 중요한 서류였다. 2019년도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서류였는데, 매니저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면서 마음에 들지 않다고 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것처럼 서류를 던지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글들이 명확하지 않다며 다시 작성하기를 요청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크게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았고 필자가 직접 고민하고 깨달아서 올바른 서류를 작성하기 바랐다. 특히 매니저는 방을 나서기 전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설명하는 것이라 어려운 것은 알겠는데, 지금 네 머릿속에서 해결된 문제를 읽는 독자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봐"라고 말하였다. 분명히 2018년도에 작성된 서류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글, 그리고 동일한 포맷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정말 바쁜 와중에 이러한 고민까지 해야 하니 답답한 지경이었다. 덕분에 매일은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빈틈이 있을 때마다 똑같은 서류를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작성했다. 


다음 미팅에서 그는 "저번보다는 나아졌는데 아직 멀었어. 너무 복잡하잖아" 라면서 다시 한번 작성을 하기 바랐고 "사실 내가 대신 작성해줄 수도 있지만 네가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라며 새로 작성하기를 요구했다. 특히 두 번째 미팅에서는 필자가 제시하는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대의견을 냈었고, 필자는 맹령히 이 사람을 설득시켜야 했다. 재밌는 것은 입사 후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필자 역시 예전만큼 쉽게 "네"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되려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약 20분간의 언쟁이 끝나고 그는 "알겠어. 네가 하려는 게 뭔지 알겠어. 알았으니 글로 잘 표현해봐" 라며 미팅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미팅이 끝나고 자리를 돌아와 보니 이건 단순한 언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시했던 내용들 중에서는 분명히 더 보완하면 아마존을 사용하는 고객들의 경험을 더 좋게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고, 그를 설득시키는 과정 중 필자의 솔루션이 왜 고객들의 문제들을 확실하게 해결시켜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순간 매니저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게 알아서 깨닫기를 바라서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날, 다른 부서에 있는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팀을 바꾸기 위해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는데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부서에 오고 싶다고 했다. 특히 필자의 매니저에 대해서 워낙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지 실제로 같이 근무하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커피를 앞에 두고 그와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같은 아마존이지만 그는 필자의 부서와 전혀 다른 느낌의 장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요하는 것을 좋아하고 책임감이 없는 상사와 같이 근무하고 있다고 말하는 동료는 다음 일은 힘들어도 배울 점이 많은 상사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필자의 매니저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나쁜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했을 때도 자주 했던 말이지만 그는 착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본인이 하는 일에 있어서 옳은 사람이었다 (Not sure whether he is the "nice" person, but for sure he is the "right" person). 옆에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봐주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해답을 찾기 바랐고, 이러한 그의 스타일을 생각해보니 이번 일 역시 분명히 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다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멋진 멘트를 하나씩 날려주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단점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생각해놓은 단점은 "He is tough. He is very, very tough"가 다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주 동안 필자는 수없는 미팅과 글쓰기를 반복했고 덕분에 퇴근을 하고 나면 밥을 먹은 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하루 종일 너무 머리를 쓰다 보니 조금이라도 생각해야 하는 일은 하기 싫어졌고 덕분에 유튜브나 예능을 켜서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잠을 청하고는 했다. 그렇게 하루는 자기 전 예전 방영된 <미생>을 시청했다. 드라마는 본 적이 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시청하였는데 해답을 찾지 못해서 아등바등 거리는 장그래의 모습이 마치 이번 주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이제 분명히 제품에 대한 이해를 완벽하게 하고 있었고, 누구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도 익숙해졌는데 어느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미생>이라는 드라마는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래도 장그래는 퇴근 후에 곱창이라도 먹지"라는 생각과 함께 잠을 청하고는 했다.


다시 0으로 돌아가서 답이 없는 글쓰기의 해답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복잡한 세금법에 대한 해답을 적는 것이기에 쉽게 설명할 방법도 없고, 결정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이 글은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할 테크 팀들에게 설명을 하기 위한 글이라고 보면 되는 것인데, 벌써 수많은 미팅들을 통해서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디테일에 대하여 내용을 설명했기 때문에 서류에 이렇게 힘을 실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만약 아마존에서 PPT를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벌써 설명을 했기 때문에 글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텐데 라며 이 전에 썼던 글을 지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중 해답은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나왔다. 점심시간 밥을 먹으면서 유튜브로 본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GltlJO56S1g)에서 이상하게 영감이 떠올랐다. 이 영상은 아마존의 창립자인 제프 베조스가 1999년도 아마존이 어떠한 회사인지 설명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곳에서 아마존이 기존 리테일 회사 혹은 인터넷 회사들과 같이 분류되는 것에 대하여 상관이 없다고 말했고 다만 우리는 고객중심 적인, 고객을 위한 회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우리 매니저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작은 깨달음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고객. 과연 내 글을 읽는 고객들은 어떤가? 2018년도 내 글을 읽었던 고객과 현재 내가 마주할 고객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팀은 이전 팀 대비 얼마나 많은 사전 지식들을 보유하고 있고, 어떤 업무 쪽에 더 특화되어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단순히 <미생>에서 나오는 장백기가 하는 문장을 줄이는 연습이 아닌 정말 그 고객의 입장에서 글을 바라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필자의 글에서 현재의 고객들이 오해할만한 요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글의 톤이나 구체적으로 나열되지 않는 문장들에서 빈틈들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필자의 매니저가 지적하는 부분이 이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필자의 경우 2018년도의 배움으로 익숙함에 자만에 빠져 있었고, 이 모든 오만은 글에서 보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깨달음을 얻게 되고 다시 글을 작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서를 작성하고 매니저를 찾아가 10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회의실에 들어가 문서를 마주했고 그 방은 침묵으로만 가득 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웃으면서 "더 이상 내가 건드릴 게 없겠는데? 이제 어떻게 쓰는지 알겠지?"라고 말하였고 이게 뭐 대단한 것인지 필자는 "아 드디어"라며 만세를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웃겼는지 우리 매니저는 큰 소리로 웃으며 방을 나갔다. 집중해서 읽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글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보였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배움이 있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 이 전에 했던 글들도 다시 한번 적으면 어떻게 적어야겠다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이라는 게 생겼던 것 같다. 물론 필자의 글이 하루 만에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똑같은 글을 적더라도 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조금 더 집착하여 글을 적는 방법을 배운 게 아닐까 싶다.


금요일 퇴근 후 필자는 같이 일하는 동료 그리고 동료의 와이프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동료의 와이프의 경우 아마존에서 근무한 지 5년이 넘기에 예전부터 필자의 매니저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설명하기로는 필자의 매니저는 입사 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급을 하였고, 그런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는 입사 후 동료들과 함께 멘토링 그룹을 형성했고 열성을 다해서 주변 동료, 후배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실제로 그 멘토링을 받은 사람들은 진급 뒤 Bar raiser (아마존에서 업의 질을 높여주는 혹은 문제를 바라보는 "bar"를 높여주는 사람들)들이 되었다고 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멘토링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업무와 병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멘토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존 채용 인터뷰를 볼 때 Bar raiser로서 (조금 더 어려운 인터뷰를 진행하여 인터뷰를 보는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수많은 인터뷰를 봤다고 했는데, 이제는 다른 bar raiser들을 트레이닝 하는 것으로 본인의 시간을 유지하고 있다. 동료의 와이프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때론 차갑게 보이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지금 그 사람과 근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이번 일주일은 다시 한번 신입사원으로 돌아가 일을 배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른 동료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서류였지만 그 작은 디테일 배울 수 있었다는 것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마존은 미국 회사다. 그렇다 보니 개인주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내 일은 내 일이고, 네 일은 네 일이다. 그렇게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은 항상 존재했었고 한국과는 다르게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회사의 또 다른 면을 본 것 같다. 본인의 일은 혼자서 해야 하지만 실제로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전임하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매니저라는 안전장치가 있었고,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드러나지 않게 길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 이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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