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배워야 하는걸까
주니어 UI/UX디자이너인데,
웹 코딩을 배워야 할까요?
마케팅 팀이랑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인데,
마케팅 기획도 하는 게 맞을까요?
디자이너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면 최소 한번은 해본 고민일 것이다. 지금까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자 가장 많이 답변한 내용이다. 연차가 쌓일 수록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부분이지만, 당장의 주니어들은 그럴 수 없으니 앞선 누군가의 인사이트가 필요할 것이다.
결론은 말하자면, 디자이너는 디자인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 내 리소스를 다 쏟으면 된다. 개발은 개발자가 더 잘 하고 잘 알 거고, 마케팅은 마케터가 더 잘 하고 잘 알 것이다. 자바스크립트가 어떻고 css가 어떻고 백엔드에서의 로직이 어떠니하는 것, 광고 소재별 CVR이 뭐니 CVC가 얼마니 하는 건 몰라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런 결론만 내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니다. '안 해도 된다' 라는 말에는 '안 해서 생길 결과에 대해서도 역시나 너의 선택이자 책임'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안 해도 되지만, 만약 배운다면 내 디자인 역량들과 융합해 어떤 시너지가 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2가지 이상의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새로운 분야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또한 각자 다른 분야의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창조해내는 능력에서도 비교 불가능하다.
즉, 안 해도 되지만, 해서 생기는 잠재적인 이득은 엄청날 수 있다는 것.
위 얘기를 하기 전에, 이전 글들에서도 계속 언급했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짚고 넘어가본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쉽게 말해, 기존의 산업에 IT 기술이 융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기존 은행 산업을 비롯한 핀테크에 토스, 핀다, 8퍼센트같은 기술 기반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우아한형제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애초에 '시장' 이나 '산업' 이라고 보지도 않았던 배달 업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탈바꿈시키면서, 플랫폼의 형태로 관련 종사자들을 디지털 세계로 이전시키는 것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지금의 스타트업 시장은 계속해서 기존 산업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디지털 기술과의 융합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앞으로 이 추세는 더욱 더 가속화될 것인데, 너무 당연하게도 우리의 일상 모든 곳에 기술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면 관리 앱으로 내 전날 취침 패턴을 분석하고, 스마트폰의 음성 비서로 집을 제어한다. 출발하면서 네비게이션 또는 대중교통 앱으로 추천 경로와 도착 예상 시간을 확인하고, 회사에선 그런 서비스를 만드는 직접/간접적인 업무를 시작한다. 퇴근하면서 배달 앱 또는 커머스 앱으로 식재료를 주문하고, 자기 전까진 OTT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즐기거나, 동영상 서비스나 소셜 앱을 즐긴다.
이렇게 기술이 집약된 일상에서, 우리가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들도 역시나 디지털 기술에 기반하지 않은 곳이 없다. 거리가 멀어 보이는 소비재 시장도 사용자 데이터를 온오프라인 매장 방문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기술을 도입해 조금 더 타겟을 고려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 전혀 기술과 무관해보이던 직무와 분야에도 기술이 접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디자이너들의 현실적인 직무에도 관련이 깊어졌다. 점점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잘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인사이트를 제품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일에 적용해보고, 디자인 앞뒤에서 어떤 일들이 수렴하고 발산하는지 그 흐름을 매끄럽게 이해하는 사람이 더욱 더 고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잠깐 또 다른 이야기를 곁들이자면, 갈 수록 디자이너의 공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계속 문제가 된 부분이지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를 거치며 디자이너의 직무가 크리에이티브를 만드는 일에서 논리적으로 제품을 설계하는 일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시각디자인과 산업디자인을 비롯한 각종 디자인 전공자부터, 논리적인 설계와 시각화만 가능하다면 누구든지 디자이너 롤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채용 시장도 하나의 경제 시장이고, 인재를 채용하는 수요자 입장에선 당연히 초과 공급 시장에서 우위를 가진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보다 물건이 많으면, 물건을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최대한 경쟁자보다 더 나은 가격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수요-공급 곡선의 법칙이다. 물론 완전경쟁시장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지만, 어떤 시장도 완전경쟁시장이진 않으니 일반적인 시장 법칙으로 생각해보자.
이런 수요-공급 곡선에서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법은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가격차별화, 제품차별화,그리고 대체재가 없는 시장의 공급자, 즉 독점 공급자가 되는 것이다.
가격 차별화 정책은 말 그대로, 다른 재화나 서비스보다 가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채용 시장이라면,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더 저렴한 임금을 받고도 가능하다거나, 같은 임금이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될 것이다. 물론, 산술적인 업무의 양은 내 일일 생산량을 초월할 수 없으니 무작정 일을 더 많이 할 수 없고,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 무작정 싸게 일할 수도 없다.
제품 차별화 정책은 다른 재화나 서비스가 가지지 않은 특장점을 소구하는 것이다. 다이슨 청소기는 다른 무선 청소기가 가지지 못한 강력한 흡입력을 제품력으로 강조했고, 갤럭시는 디스플레이를 접음으로써 제품 차별화를 꾀했다. 채용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른 디자이너에 비해 어떤 비교불가능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더 심화되면, 대체 자체가 불가능한 독점 공급자가 된다. 즉, 채용 시장에서 '나' 라는 디자이너는, 다른 어떤 디자이너와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No.1 이 아닌 Only 1 이 된다는 것이다.
그 유일무이한 '나' 가 되는 가장 쉽고도 우직한 방법이, 다른 분야와의 접목을 통해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인사이트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몇년 전에 한참 유행했던 '융합형 인재' 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지금은 또 폴리매스형 인재라는 표현이 새로 등장해 이전과는 또 다른 인재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여담이지만, 점점 디자인 전공은 더욱 더 크리에이티브 영역과 제품 영역으로 이분화될 것이다. 지금은 어느정도 혼재된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테크 기반 디자이너는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공학적인 사고방식이 더욱 더 요구됨에 따라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품의 사용성을 논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느냐가 핵심 역량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얘기한 1.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인사이트의 융합, 2. 디자이너의 공급 과잉 환경에서, 디자이너의 직무 역시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디자이너는 단순히 크리에이티브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제품이나 서비스를 설계하고 소비자 또는 사용자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기획자가 설계한 무언가를 디자이너는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했었고, 이 다음의 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개발을 하든, 마케팅을 하든, 생산을 하든 했었다. 크리에이티브 직무로 이해됐었으니까.
지금의 디자이너는 사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무 직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은 이게 당연한 것이다. 기획자, 개발자, 마케터, 영업, 인사, 총무처럼 결국 회사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인 것인데, 그 전까지는 디자이너의 업무는 폄하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역처럼 언급이 금기시되어 있던 셈이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가져온 조직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와 시장의 격변이 디자이너의 근본적인 업무 방식을 바꾸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전의 워터폴 방식의 제품 생산 방식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대격변을 통해 제품이나 기능 단위의 작은 조직의 팀워크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론 규모가 큰 대기업이나 전통적인 업종의 기업들은 크게 변화하진 않았다. 규모가 클 수록 조직이 기민하게 대응하는 게 힘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움직이는 것의 비용과 리스크 또한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안정적인 수익 모델들을 많이 발굴해낸 상황에서, 시장의 요구에 빠르게 반응할 필요가 다소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거나, 기술 기반으로 성장한 스타트업과 기업들은 얘기가 다르다. 디지털 기반 의존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빠르게 시장에 대응해야 한다. 즉, 전사적으로나 팀 전체가 요구사항에 빠르게 대응하고 제품을 고도화해야 하는 미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의 수요가 점점 줄어드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움직이는 기술 기반 조직에서, 디자이너는 대부분 PO의 기획을 논리적으로 시각화하고, 그것을 개발자와 협업하여 설계 및 구현하는 직무를 담당한다. 만약 마케팅 조직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라면 팀에서 필요로 하는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거나, 광고 캠페인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광고 소재들을 제작하기도 하고, KPI를 달성하기 위한 온오프라인 브랜드 자산들을 고도화하는 직무를 담당한다.
근본적인 질문에 기초해서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R&R이 명확해서 고민 조차 할 틈이 없는 대기업 등은 제외하고, 이 질문을 자주 하는 디자이너들이 다니는 중소스타트업 또는 에이전시로 좁혀서 보자.
이 디자이너는 PO나 기획자가 찾아낸 사용성 문제에는 관심이 없거나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PO가 작성한 요구사항 문서를 피그마에 구현할 뿐이다.
예를 들면, 이 페이지에서 상담 버튼을 더 강조하면 상담 전환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피쳐를 피그마에 구현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상담 버튼을 더 진하게 만들거나, 크게 만들거나, 눈에 띄게 만들 것이다. 이때 이 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실행되어야 하는 CTA 버튼이 이미 따로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기획에 적극 참여하지 않거나, 워터폴 방식에 익숙한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는 이 부분을 기획 단계에서 짚어내야 한다는 걸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가 기획도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다. 디자이너는 당연히 기획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이 기획이 제품 관점에서 어떤 디자인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반영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기획에 참여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면, 기획에서 어떤 디자인 방향성이 나오든 그것에 대해서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일종의 방관한 책임을 무는 셈이다.
또한 이 디자이너는, 내 디자인이 실제 개발 구현 단계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개발자가 이해해야 하는 언어로 디자인을 정리해주는 법을 모른다. 단지 기획안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을 뿐, 내 디자인이 웹 환경에서, 앱 환경에서 어떻게 코드로 처리되어 출력되는 지 모른다.
예를 들면, 웹이든 앱이든 텍스트는 글자 자체가 가진 공간을 고려해 사각형의 영역으로 처리된다. 박스 모델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디자이너라면, 글자 자체의 아웃라인을 기준으로 정렬하는 우를 범할 수 있고, 이는 개발자로 하여금 레이아웃에 대한 일관성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결국 결과물이 디자인과 굉장히 달라지게 되고, 디자이너와 개발자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지게 된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마케팅 조직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역시 그렇다. 디자이너가 내 작업물이 마케팅 전략에 어떻게 쓰일 지를 궁금해하지 않으면, 내 디자인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될 수도 있다. 또는, 내가 마케팅 전략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한 디자인을 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마케팅 기획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는 지금 왜 이 광고 소재를 만드는지 더 잘 이해할 거고, 그 과정에서 더 좋은 인사이트를 얻기 위한 디자인을 고민해볼 수도 있게 된다. 단순히 예쁜 광고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우리 소구점을 더 잘 전달하려면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제품은 어떻게 보여야 할까, 텍스트의 적절한 비율이나 크기는 어떻게 될까? 그래서 이렇게 하면 마케팅 플랜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내 성과를 타인에게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된다.
그래서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자면, 디자이너는 배우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걸 더 전문적으로 하는 다른 직무와 협업할 때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나에게 작업물을 전달해주는 지, 또 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해줘야 하는지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획 의도를 잘 알고, 기획자와 소통이 가능하며, 디자이너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 기획안을 작업하는 디자이너는,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보다 당연히 업무 효율은 물론, 업무 평가에서도 더 나을 것이다. 개발자가 어떤 식으로 코드를 처리하는 지, 웹이나 앱에서 내 디자인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 지 아는 디자이너는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보다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작업의 속도나 제품 개발 속도 자체도 확연히 차이날 것이다. 마케팅 인사이트가 충분하고 브랜드 마케팅부터 퍼포먼스, 그로스해킹에 대한 지식이 있는 디자이너라면, 마케터와 협업하면서 오히려 서로 배우는 게 많아 좋은 협업 상대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디자이너가 개발을 배울 필요도 없고, 마케팅 기획을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상대방과 소통하고 협업하기 위한 정도의 기본적인 개념들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해진다. 그 이후에 더 배울지 말지는 각자 본인의 필요에 따르면 된다. 물론 2가지 분야 이상의 인사이트가 있는 디자이너라면 위에서 말했듯 정말 비교불가능한 인재가 된다. 게다가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잘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디자이너 초과 공급으로 인한 가격 조정을 겪지 않기 위해선 앞으로 필수인 요소가 될 것이다.
결론을 완벽히 내리자면,
위의 이야기에 기초해서, 디자이너가 다른 분야의 직무 경험까지 하는 상황이 있다. 디자이너가 기획 리드를 한다든가, 마케팅 기획 전반을 다 담당한다든가 하는 경우인데, 일명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니깐 디자이너가 ㅇㅇ도 해봐' 이다. '경험 삼아 해본다' 라는 것이다.
이게 진짜 '경험'이 될 때와 안 될 때를 구분하는 법은 별도의 글을 또 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