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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순간들

익숙함이 깨질 때 필요한 마음의 여유

by 김태길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이 유독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흐르던 화면이 오늘은 어딘가 어색해 보이고, 손가락 끝에서 매끄럽게 이어지던 인터랙션이 갑자기 잘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디자인이라는 일이 원래 일정한 리듬을 타야 편안해지는 작업이라 그런지, 이 리듬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전체가 무겁게 느껴지고, 머리로는 분명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그만큼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화면을 오래 바라보고 있어도 손이 잘 움직이지 않고, 문장을 고쳐도 만족스럽지 않고, 구조를 잡아도 이전보다 더 복잡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런 날이 오면 대부분은 능력의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정도도 자연스럽게 못하지, 지난주에는 잘 되던 걸 왜 오늘은 못하고 있는 거지 같은 생각이 차례대로 떠오르고, 그 생각들은 마음 한쪽을 조용히 흔들어놓는다. 그런데 시간 지나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다 보면 이 감각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의 문제라는 걸 천천히 알게 된다. 디자인이 어려워지는 순간은 대개 기술이 부족하거나 감각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익숙하게 해오던 사고의 무늬가 잠시 중단되었기 때문이고, 이 중단이 일의 전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흐름이 깨지는 순간은 보통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더 잘하려 할 때 찾아온다. 화면을 조금 더 정교하게 만들고 싶어서 기존에 하던 방식을 다시 점검하는 순간, 시스템 구조를 더 단단히 묶고 싶어서 작은 규칙들을 재정비하는 순간, 더 나은 사용자 흐름을 만들고 싶어서 익숙한 패턴에 의문을 던지는 순간. 이런 순간들은 모두 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인데, 그 시도가 기존 리듬과 부딪히면서 잠깐의 불편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성장하려는 시도일수록 일은 더 어려워지고,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억지로 리듬을 되돌리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잠시 머물러도 괜찮다는 여유다. 화면이 더디게 만들어지고 글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 시간은 능력이 멈춘 시간이 아니라 감각이 갱신되는 시간이다. 기존 방식이 더 이상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는 뜻이고, 그 순간이 오면 마음은 혼란을 느끼지만 작업은 이전보다 넓어진 시야를 향해 다시 움직이려 한다. 문제는 이 사이의 간격이 잠시 불편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불편을 능력 부족으로 오해하곤 한다.


익숙함이 깨지는 시점은 사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느 부분을 고쳐야 흐름이 더 자연스러워지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의도하지 않은 감정까지 화면에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작업의 폭은 넓어지고, 판단의 질도 천천히 올라간다. 하지만 이 과정은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성장은 대체로 불편함을 동반하고, 디자인은 유난히 이 불편함을 민감하게 전달하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날이 와도 조금 덜 흔들리려고 한다. 어제까지 잘되던 일이 오늘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그게 나빠진 신호가 아니라 다음 단계가 열리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하려 한다. 화면이 잘 보이지 않는 날은 눈이 바뀌는 날이고, 문장이 잘 잡히지 않는 날은 사고의 경계가 바뀌는 날이고, 구조가 어지럽게 느껴지는 날은 새로운 구조가 생기려는 날일 때가 많다.


디자인이 어려워지는 순간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이전보다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일하게 된다. 그래서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고, 잠시 불편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려고 한다. 일은 결국 익숙함과 낯섦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그 반복 속에서 디자이너는 조금씩 더 깊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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