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Intro
공간의 역사성에서 품어져 나오는 창조성...
오래된 공간에 이끼가 끼고 삶의 경험들이 축적되어야만 이를 기반으로 하는 창조성이 나타나게 되고, 한편으로는 창조적 계층들은 이러한 공간에 편안함을 느끼고 영감을 얻는 창조적 계급들과 공간의 역사성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게 된다. ‘마지막 잎새’의 오헨리가 즐겨 찾던 르 피가로 카페(Le Figaro Cafe)가 있는 뉴욕의 소호(SOHO) 거리가 그러하고, 대형 창고가 많은 산업화지역에서 신흥 테크놀로지의 허브로 변모한 캘리포니아의 소마(SoMa) 거리 또한 이러한 역사성과 창조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개성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공간의 점령군 행세를 하는...
지난 십여 년간 도시재생사업은 전면철거 방식을 활용해 기존 지역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인조 공간을 형성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왔다. 이러한 형태의 도시 재개발은 새로운 자본의 유입을 통해 사업시행자와 일부 주민들의 부(富)를 창출하는데 기여했지만, 뜻하지 않은 많은 부작용 또한 초래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터를 지켜오던 원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질적인 사람들로 공간이 채워졌으며, 공간에서는 그동안 축적되어온 삶의 흔적들이 지워져 갔다. 새로 지은 아파트 콘크리트 벽에 키 작은 묘목들만이 간신히 푸르름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어 여름철 한낮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조차 없어진 무언가 답답하고 위태로운 공간만이 존재한다.
프랜차이즈화 되고 규격화된 대규모 자본이 점령한 상업적 성격의 거리는 더 이상 창조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좁고 허름한 골목길이 사라진 장소에는 넓은 도로가 생겨나 사람보다는 차가 공간을 점유해가고 번듯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공간의 점령군 행세를 한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공간과 억눌린 욕구를 남몰래 배설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사라져 간다.
공간은 그 스스로가 겪어온 세월을 상징하는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을 숨 막히게 하는 공간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공간에서는 호기심 많고 창의성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들이 형성되고 사멸되는 과정들을 반복하고 있다. 강남 압구정동, 청담동의 아파트 숲 주변에서 생겨난 카페촌과 문화공간들이 그러했고, 가로수길, 홍대 앞의 창의적 공간과 문화거리 형성에 이어 이태원 경리단길과 해방촌, 성수동 거리, 그리고 북촌과 서촌 등으로 호기심 많고 재능 있는 창조계층들이 모여들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끼를 발산하고 새로운 문화 형성의 주체로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들을 핫플레이스(Hot Place)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러한 창조계층들이 모여 있는 핫플레이스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새로운 형태의 자본이 집적되게 된다. 핫플레이스의 골목길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다른 곳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을 씻어낼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동경하면서 그 수요에 따른 새로움이 끊임없이 창출된다. 이러한 긍정적 순환고리가 이어지면서 해당 골목길뿐만 아니라 이를 품고 있는 지역 전체가 활성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골목길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해당 지역 곳곳에는 새로운 창조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창조적 인재가 더 많이 모여들고 사람들과 창조적 자본이 집적된다. 물론, 넘치는 수요를 따라 뒤늦게 유입되는 대규모 자본에 의해 자본력이 약한 창조계층들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fication)의 역설(Paradox)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골목길은 자연스러운 전이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공간으로 변모되며, 또한 인근 지역에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만들게 되면서 도시 속 공간의 긍정적 전이가 이뤄지게 된다.
핫플레이스를 형성하는 창조성은 해당 공간이 겪어온 세월, 곧 역사성에서 싹트게 되며, 그만큼 공간의 형태와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공간에서 건축물의 형태가 변화되고 입주하는 사람, 업종들은 변화되지만 해당 장소와 골목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와 콘텐츠는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공간은 그 스스로가 겪어온 세월을 상징하는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있다.
역사성이 숨 쉬는 골목길을 부활시키는 도시재생의 시작...
정체성이 있는 공간에서는 정(情)이 존재한다.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것은 세련되고 번듯한 공간이 아니라 공간에서 은연중에 풍겨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정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오는 쌍문동 골목길에서의 끈끈한 정을 차지하고라도, 홍대 앞 협소하고 기다란 골목길이 가지는 세월이 묻어나는 깊고 정감 있는 느낌의 공간들에서 영감을 찾고자 하는 창조계급들의 집적과 이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이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정을 내포하고 있는 골목길이 창조계급이 새로이 창조하는 콘텐츠들로 채워지면서 사람들이 더욱 선호하는 공간, 즉, 핫플레이스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장소가 모여 골목길이 되고, 골목길이 모여 지역이 된다. 역사성과 정체성을 보존하는 형태의 골목길 재생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성이 발현되는 터전을 마련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며, 이러한 골목길의 부활은 지역을 말 그대로 재생시키는 촉진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도시 재개발은 도시가, 지역이 가지고 있는 색채와 추억들을 파괴했던 일종의 ‘도시 파괴’ 과정이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수익성의 논리에 의해 새로운 자본이 유입될 수 있는 여지는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역사성을 품은 창조의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공간으로서 골목길을 보존하면서 지역 전체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도시재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