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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이사는이야기 Oct 03. 2023

Ep.27 적도제를 아시나요?

[군함 타고 세계일주]

고국을 떠나온 지 42일이 지난 날이었다.


러시아, 미국, 멕시코 그리고 콜롬비아를 지나 페루를 향하는 남태평양 항해길이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지만 105일간의 순항훈련 일정이 아직 반 이상 남아있어, 많은 승조원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던 시점이었다.


“알림. 적도제 시작 15분 전. 승조원 총원 비행갑판에 집합 15분 전.”


적도제란 말 그대로 적도를 지날 때 하는 제사로서 일종의 통과의례다. 위험한 적도를 지나갈 때 무사통과를 기원하는 것이다. 15세기 포르투갈 선박이 적도를 통과하면서 한 의식이 유래라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17세기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박이 위험한 해역을 통과할 때 해신(海神)에 대한 희생을 표시한 것이 기원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처음 수업시간에 적도제라는 게 있다는 걸 들었을 때 바람 한 점 없어 파도도 높지 않은 적도에서 왜 제사를 지내는지 의아스러웠던 적이 있다. 위험한 부분이 하나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교수님께서도 내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셨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셨다.


"범선 시대에는 바람이 없는 것이 두려움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무풍지대는 몇 달이고 묶인 채 머무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많은 배들은 승조원들의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겠지. 때론 현재의 기준이 아닌, 과거의 기준대로 과거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상 수업 끝."



범선 시대가 저물고 동력선 시대인 요즘엔 적도에서의 위험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러나 바람이 필수적인 과거의 이곳 적도는 죽음을 동반하게 되는 무서운 곳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과거는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야 한다는 말. 너무나 인상 깊었다.


적도는 더 이상 위험하진 않지만 적도제라는 과거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 승조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마치 축제의 장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적도제의 영어 표현인 Neptune's revel으로도 알 수 있다. Neptune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로마 신화식 이름이고 revel은 사전적 의미로 흥청거리며 벌이는 축하라고 하는데, ‘해신의 축하파티’라는 말이 요즘의 문화와 딱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포세이돈 대신 자랑스러운 ‘용왕님’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는 점 빼고는.


“용왕 승함!”


용왕님은 배에서 가장 재치 있는 수병의 몸을 빌려 이곳 남아메리카의 태평양까지 친히 오시게 되는데,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함장님을 부르는 일이다.


“함장은 얼른 나와 예를 갖추어라!”


용왕님의 부름에 함장님이 불려 가시기만 해도 승조원들은 재밌어하는데, 우리 배의 No.1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상황이 몇 안 되기 때문이다. 당당히 서계시는 함장님 앞에 왠지 모르게(?) 긴장한듯한 용왕님이시지만, 이내 심호흡 한 번 깊게 하고 마음을 굳게 먹으셨는지 마음에 드는 제물을 바치라고 호통을 치기 시작한다. 함장님은 용왕님의 호통에 못 이기는 척 ‘모든 승조원 평일 휴무권’이라는 선물을 바치고 자리로 돌아간다.


가장 중요한 휴무권을 손에 얻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고조되어 메인이벤트가 시작되는데 바로 용왕님의 배신자를 찾는 시간이다. 용왕님께서는 불로장생의 꿈은 잊어버리셨지만 아직까지도 본인을 속인 토끼에 대한 괘씸한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계셨기에 주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토끼를 찾기 시작한다.


“작전참모, 작전관, 주임원사, 갑판장은 차례대로 나오너라!”


통상적으로 토끼로 선택되는 사람들은 군기를 담당하는 간부들로 이 역시도 많은 승조원들이 재밌어하는 요소이다. 그들을 앞으로 불러와 왠지 모르겠지만 토끼를 찾는데 필요하다며 춤을 한 번 춰보라 하기도 하고, 코끼리코를 돌리게 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전문적인(?) 방식을 통해 잡힌 토끼는 마침내 곤장형에 처하게 된다. 군기담당 간부들이 춤을 잘 추기 위해 노력하고, 코끼리코 어지러움을 참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승조원들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토끼라는 제물을 바쳤으니 그대들에게 적도를 통과할 권한을 주겠다!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그럼 이만.”


“용왕 하함!”


용왕님께서 모든 노여움을 푸시고 하함하시게 되면 이제부터는 파티의 시작이다. 비행갑판에서 태평양의 푸르른 바다를 배경 삼아 삼겹살, 목살, 소시지를 구워 먹으면서 우리들은 두런두런 모여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다음 기항지에 내려서는 뭐 할 거냐? 가족들 선물들은 샀어? 여자친구랑은 안 헤어졌냐?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긴 항해에서 잠시나마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순항훈련전단은 긴 항해를 버텨낼 힘을 얻고 다음 기항지 페루를 향해 오늘도 바닷물을 가른다.


적도 통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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