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2년 전 참여했던 워크숍에서 한 원장님이 '마케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런 단서를 붙였다.
"호모 사피엔스가 왜 지금까지 살아 남고 번영할 수 있었는지 아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에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전율과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본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사피엔스>는 언젠가 반드시 읽어보리라 다짐하게 된 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을 완독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사피엔스>를 통해 빅 히스토리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인류의 방대한 서사에 매혹되어 한 장 한 장 탐독하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드디어 길고 긴 시간여행을 지나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었을 때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하나 생겨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로서 선조들이 지나 온 발자취와 내가 딛고 있는 발자취를 돌아보며 한없이 겸손해지게 만드는 책이다.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는 오늘날까지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호모 사피엔스가 특별했던 두 가지 이유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오늘날 지구를 '접수' 할 수 있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사피엔스가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개념도 믿고 행할 수 있는 독특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 허구를 바탕으로 다수가 집단을 이루며 유연하게 협동을 하는 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시기에는 최소 여섯 종의 호모 종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지고 나서 혹은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서 사피엔스가 출연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동시대에 존재했던 여섯 종의 호모들 중 유일하게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아 그 맥을 잇고 있다.
우리 선조가 다른 종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상상으로 지어 낸 이야기를 신봉하며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 여러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사회적인 시스템을 갖춰나가며 서로 협력하고 유연하게 적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상의 생태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고대에 존재했던 다수의 동물을 멸종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세를 확장하며 전 지구가 호모 사피엔스가 이룩한 문명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일으킨 세 가지 혁명
사피엔스는 세 가지 혁명을 일으키며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 혁명 중 첫 번째는 인지혁명, 두 번째는 농업혁명, 그리고 세 번째는 과학혁명이다.
1. 인지혁명
인지 혁명을 통해 사피엔스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허구를 말하고 믿을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신화를 믿는 것과 같은 집단적인 상상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인원이 모이고 결집해 유연하게 협력하는 문화를 이끌어 냈다. 이는 다른 종들은 가지지 못한 호모 사피엔스 만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인지 혁명은 공통된 믿음이나 가치관을 기반으로 낯선 이들끼리도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부족이나 국가, 제국과 같은 다양한 문화를 촉발하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2. 농업혁명
수렵과 채집을 하던 인류는 농업혁명을 기점으로 곡물을 경작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생활양식이 초반부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기보다 노동 시간을 늘리고 굶어 죽을 위험을 키우며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트리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잉여 식량을 저장하게 되고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 여기서 발생한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들을 먹여 살리며 그들이 정치, 전쟁, 예술, 철학 등을 발달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인구 폭발의 기폭제가 되었고 엘리트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의 문화는 농부가 흘린 피와 땀을 바탕으로 이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고자 고민했던 극소수의 특권층이 세운 상상의 질서의 산물인 셈이다.
3. 과학혁명
과학 역시 개인과 국가의 사익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의 등장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사유 재산을 늘리기 위해, 제국의 번영을 위해 과학자들에게 흘러 들어간 자본은 역사상 유례없는 빠른 속도로 세상을 개벽시켰고 생산과 소비를 확대 시켰으며 심각한 환경 파괴를 불러일으켰다.
과거 200년의 변화 양상보다 현재 20년의 변화 양상이 빠르며 세상은 몰라보게 급변하고 있다.
과학혁명은 이제 '영생'이라는 인간의 욕구와 결합해 생명공학 혁명을 일으켰고 인류의 존재 여부조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선조들의 위대한 혁명 덕분에 물질적인 풍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들보다 지금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극심한 빈곤을 벗어났고 과거에 존재했던 폭력과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며 길어진 수명과 함께 편의를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들의 등장으로 새로운 빈곤문제로 고민하고 타인에 의한 폭력보다 자의로 인해 높게 치솟는 사망률을 지켜보고 있으며 삶의 의미를 잃어 빛이 바랜 상태로 긴 여생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고찰하며 든 생각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의도대로' 일어나진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에 가깝고 예측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로 인해 역사는 시시각각 변해왔으며 우리 개인은 사피엔스 집단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순응과 미약한 저항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길고 장엄한 서사는 인류를 또 어떤 미래 앞에 데려다 놓을지 모르고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사피엔스 종은 위대하고 용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나약하기도 한 지구상의 생물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무척 겸허해졌다.
인류의 명암을 시시때때로 목격하면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불러온 풍파를 곱씹어 보게 되었고 이 거대한 유기적인 세계에서 나 하나만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경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발목을 잡았고 나도 지금 그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구상의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다른 모든 생물들이 연결되어 있고, 허구와 현실이 연결되어 있다.
인류는 위대한 도약을 이루어내는 동시에 그로 인한 어두움도 함께 잠식하고 있으니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이 거대한 실타래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문제와 맞서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이는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무딘 촉각을 곤두세우고 멀리 내다보는 적극적인 노력을 함께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