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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이기는 법

우리는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by 박혜민

무한 경쟁의 시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경쟁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로 계급을 나누고, 이제는 금을 넘어 다이아몬드 수저라는 말도 나오는 자본으로 계급을 나누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모두가 부자를 꿈꾸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버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회, 이런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나는 그 답답함을 한 권의 책에서 해결책을 본 것 같다. 그 책을 통해 얻은 지혜를 나는 경쟁에서 이기는 법이라 칭하고 싶다.


독서 모임에서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를 함께 읽었다. 처음 제목을 보고,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책 내용을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1818년의 루뱅 대학교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인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토대로 지적 해방에 관한 다섯 가지 교훈이라는 부제로 랑시에르가 쓴 책이다.

네덜란드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프랑스인 교사 조제프 자코토, 프랑스 말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학생 그 사이에서 어떻게 배움이 일어났을까 그들 사이에는 네덜란드어-프랑스어 대역판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학생들은 책의 내용을 스스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수업 이후에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거나 시를 짓지 못하던 학생들이 스스로 깨우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게 된다. 결국 『무지한 스승』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차이를 전제로 한 교육 방식에 의문을 제시하는 책이다. 하지만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인 모험은 윤리와 교육학을 전공한 나의 지금까지 생각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기존의 교육 방식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나누고 배워야 할 모든 것 위에 무지의 베일을 씌운 후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알아야 할 것을 설명하고 이해시킨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설명하는 행위는 피교육자는 혼자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제트 자코토의 수업은 학생들이 설명하는 스승 없이도 스스로 배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학생들이 배운 것은 스승의 학식이 아니었으며, 바로 책이 스승과 학생을 지적으로 평등하게 이어주는 끈이었다.

이런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토대로 랑시에르는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교육학에서 이야기하는 지능의 차이는 지능의 차이가 아니며 의지의 차이이며 주의를 기울이느냐 안 기울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교사이기에, 특히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가르치는 교사이기에,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었던 교육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번 믿고 끝까지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혼자였다면 그 책은 집어던졌을 것이다. 함께 읽었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지만, 그 힘든 길을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 읽은 후, 사람은 배우려는 의지가 있을 때 스승 없이도 혼자서 배울 수 있다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고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다. 지능과 평등을 동의어라고 주장하는 랑시에르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된 불평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시험이라는 제도로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나누고,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아이들을 줄 세운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아이들이 모두가 희망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특권을 누리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S여고 사태가 벌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빠가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의 정답을 알아내고, 딸들에게 정답을 외우라고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그 뉴스를 접한 모든 사람들은 정말 그랬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며 진위를 따지고 있는 것 자체가 안타깝다.



사회에서는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 수립(樹立)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지한 스승』 p.197



랑시에르는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을 구분하는 교육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해방된 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그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은 스스로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보편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모두가 지적으로 해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모두가 진정으로 평등해지고 모두의 차이를 각자의 다름을 모두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회라면 각자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사회라면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는 인재를 탄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적 평등이 받아들여질 때, 교실에서 교육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자식이 다른 자식들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자식을 교육해야 하는 부모의 역할을 사교육에 내어주고, 선행학습을 통해 남들보다 앞서기만을 바라는 부모의 욕심이, 아이들의 주체성을 없애버리고 무조건 이해하고 암기하는 바보로 만들고 있다.


공교육의 현실화를 이야기하면서 대입이 정시보다는 수시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면서 고등학교 3년의 시간 중 단 한순간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인생은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 소중한 순간이, 옆에 있는 친구들보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의 자신됨을 찾아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등수를 나의 등급을 매기고 서열화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 세상을 향해 웃어주었으면 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지적으로 평등하고, 다만 지금의 성적 차이는 의지의 차이와 주의의 차이일 뿐이며, 나의 의지와 나의 주의는 성적이 아닌 나만의 꿈을 향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순간순간을 소중히 살아간다면, 꿈이 현실이 되는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이룬 자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행동한 자라고 생각하기에 진정한 지적 해방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무지한 스승인 나와 의지와 주의를 가지고 자신의 삶의 목적과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경쟁사회 속에서 진정한 승리를 하기를 소망해 본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사회 속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런 자연 속에서나 가능할지 몰라도 사회 속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비아냥 거린다. 그런 비난에 고민에 빠져보았다. 자연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루소의 자연주의가 떠올랐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최초의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왜 사회를 만들면서 불평등하게 되었을까? 루소는 그것을 인간은 자연스럽게 타자로부터 자신을 인정받으려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허영(vanity)이다. 사회가 만들어지고 인간들 사이에서 생기는 감정, 인간의 허영심이 사회 불평등의 기원이 된 것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타자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기를 위하는 것이다.

비교하지 않으려면 사회를 떠나야 하는 것인가? 고립되어 사회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가능한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로 답을 찾아보고 싶다. 루소가 이야기 한 '일반의지'라는 그 개념을 해답을 찾고 싶다. 공동체의 공동선을 향한 의지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면, 우리가 허영심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나기를 희망하는 그 욕망에서 벗어나 그것은 만들어진 허상임을 깨닫고, 진정한 해방, 진정한 자유로움을 찾으러 가는 지성인들의 공동체를 꿈꿔본다.


인간은 강제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Forced to be free) -루소


우리에게는 책이 있다. 우리가 책을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가정 안에서 부모들이 지적으로 해방되어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철학자의 의무) ' 로 동굴 속에서 진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는 동굴 속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 제대로 된 진짜를 본 자(철학자)는 그것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하지만 동굴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들은 그 그림자가 진짜인 줄 알고, 그 진짜를 아는 자(철학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또, 석가모니의 해탈 역시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 속에서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고 있는 우리는 그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탈을 해야 한다.


나는 랑시에르의 '우리는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이야기와 석가모니의 이야기, 루소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그 경쟁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허상에서 깨달은 자는 경쟁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먼저 깨달은 자의 의무인 것이다.

혼자서는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다. 책을 통해 깨달은 자들이 지성의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는 책이 있다. 책을 읽고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어둠을 깨우는 작은 불빛은 처음에는 희미할지 모르지만, 그 빛은 어둠을 밝히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있기에,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그대가 있기에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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