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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Nov 19. 2020

우유에 밥 말아먹는 아이.

behind story.


브런치 북에 출품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이틀 동안 4-5편을 내리 쓴 이후 그게 뭐 얼마나 힘들었다고 몇 편 안 쓴 주제에 번 아웃도 오고, 글 구상하고 써 내려간다고 밀렸던 일들도 해치우느라 어언 3주가량이 지나버렸다. 새로운 글은 메모장에 습작으로 완성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남아있다.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로 흐른다. 벌써 삼주라니.

소년이 소녀에게 에필로그를 쓰면서 어떻게 그들의 만남이 운명적이었음을 표현할까 생각을 많이 했다. 모든 일은 우연의 합이라고 믿고 있는 나이기도 하고, 과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공부했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 쪽으로  생각이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고민이 많이 됐다. 그래도 가끔은 운명이 존재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유에 밥 말아먹는 아이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다.

그건 실제 내 얘기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집에서는 옆집의 1층 거실이 내려다보였는데 그 집엔 나와 동갑짜리 여자애가 살았다. 옆집이기도 하고 동갑이기도 했기에 많이 친하진 않았어도 가끔씩 그 집에 쭐래 쭐래 그 애를 만나러 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그 애는 언제나 밥을 우유에 그득히 말아서 그릇째로 들고 먹으며 로보트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애와 함께 있는 기억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 애는 우유에 밥을 만 채로 티비 앞에 앉아있다.

우유, 밥, 로보트 만화.

아마도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흰 우유에 밥을 말아먹는 모습이 어린 내게 굉장히 기이하게 생각됐나보다. 가끔 그 장면엔 우리 오빠가 등장하기도 하고 그 애의 여동생이 우리 곁을 서성서성 오가기도 한다.


우유에 밥 말아먹던 아이는 중3 때 다시 만나게 됐다. 그것도 그 많은 아이들 중 하필 나와 첫 짝꿍으로. 당연히 시간이 많이 지났고 얼굴도 많이 변했으므로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좀 더 서로의 얘기를 이것저것 털어놓다 보니 각자 살고 있는 동네도 알게 되고 졸업한 초등학교도 알게 되고 그랬다. 나는 7살 때 이후로 이전 동네를 떠나 많이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곳 동네 이름도, 모습도, 살던 집의 모양도 다 기억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오, 너는 내가 7살 때까지 살았던 그 동네에 살고 있구나. 나두 거기 살았었어.

우리 집 뒤쪽으로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구 그 맞은편으로는 작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지. 그 길로 올라가다 보면 약수터도 나오고 작은 공원이 있어서 거기서 어른들은 운동기구 위에서 운동도 하고 약수 물도 마시고 그랬어. 근처엔 아카시아 나무가 많아서 오빠가 꽃을 따주면 꿀을 쪽쪽 빨아먹기도 했고, 잠자리를 잡아서 꼬리에 실을 매어 잠자리랑 같이 뛰어다니곤 했는데..

마주 본 아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 정말? 우리 집 뒤로도 놀이터랑 약수터 올라가는 길 있는데?
- 으응? 너네 집 위치가 정확히 어딘데..?
- 예전에 우리 집 옆에 문구점이 하나 있었어. 그 바로 옆집.
- 진짜....? 난 그 옆집 살았는데...


점점 맞춰져 가는 퍼즐 조각에 우리는 마주 보며 상기된 볼을 했다.


- 우리 옆집 살던 애가 맨날 로보트 만화 보면서 우유에 밥을 말아먹었었거든. 혹시....


그 애가 씨익 웃었다.


-나 우유에 밥 말아먹는 거 좋아해. 지금도.



글쎄. 시간을 돌고 돌아 9년 만에 옆집에 살던 7살짜리 두 아이가 16살이 되어 첫 짝꿍으로 만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렇게 만나서 지금까지도 둘도 없는 친구로 남아있다. 그 친구 결혼사진 속 들러리가 바로 나니까.

 우연의 합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운명같이 얽히고설킨 실타래들. 그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교차점 곳곳에 내 운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실을 즈려밟고 서있는가 보다. 모카빵 복실이가 소녀의 실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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