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Elysium Mind』에서 발췌한 편지 연재 #1
AI개발자 리암은 친구들과 스타트업 센티텍(Sentitech)을 설립합니다.
종종 이유 모를 정서적 결핍을 느꼈던 그는 공감형 인공지능이란 목표로 AI 『Elysium Mind』를 개발합니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정서적 치유를 도울 Elysium Mind ver.1을 완성하고 시연회를 앞둔 어느 날, 리암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소울메이트인 에단(Ethan)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
나의 오랜 친구 리암(Liam)에게.
이메일을 보낼까 생각하다 오랜만에 펜을 들었어.
편지를 쓰는 건, 고등학교 때 셀렌느(Selène)에게 고백하느라 썼던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친구.
나는 지금 포틀랜드 헤드라이트(Portland Head Light)에 나와 있어.
커피 트럭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철썩’이는 파도 소리, 짠내 나는 바닷바람, 그리고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내 온몸을 간질이는 것 같아.
리암, 난 요즘 세상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 노력 중이야.
맞이하는 순간들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와 함께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고.
그런데 갑자기 웬 편지냐고?
내 삶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야, 리암.
너는 오래도록 나의 소울 메이트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말이야.
몇 달 전, 나는 포틀랜드 메디컬 센터에 입원을 했었어, 낚싯배를 몰다가 갑자기 쓰러졌거든.
(알지? 내가 주말에 part-time job으로 낚싯배를 모는 것.)
근래에 체중이 25파운드 이상 빠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병원에 가는 걸 미루다보니 내 몸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나 보더라고.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무려 48시간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다더라.
정말 묘한 느낌이었어.
내 시간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했어. 삶의 일부분이 잘려나간 느낌이랄까.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았다고.
30살의 내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60살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봐, 리암.
무슨 시간 여행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튼, 깨어난 후 몇 가지 검사들을 받았어.
MRI, 혈액 검사, 조직 검사… 이리 저리 끌려다니며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진짜 괴로움은, 모든 검사가 끝난 뒤부터였어.
난… 불안했단 말이야, 리암.
확정되지 않은 미래가 우리에게 꼭 희망만을 주는 건 아니야, 그것이 이토록 큰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거울을 볼 때마다 지금의 초췌한 내 얼굴이, 그래도 앞으로 보게 될 내 모습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게 아닐까란 생각이 자꾸 들었어.
‘에단, 검사 결과 나왔어요. 피터에게 가면 알려줄 거예요. 2층인 거 알죠?’
입원실은 5층이었는데, 2층 피터의 진료실까지 가는 길이 왜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지,
맞아, 리암. 피터를 마주하기까지 난 수없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때의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피터를 만나면 내 삶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불안함에 떨며 피터 앞에 앉았을 때,
‘미안하네, 에단. 하지만 난 자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네, 이해해주게.’
피터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한참을 망설이는 것 같았어.
그리고 이런 말들을 해주었지.
췌장암 4기, 수술 불가, 5년 생존률 1~3%, 현재 기대수명은 1년 미만.
물론, 피터가 절망적인 말만 늘어놓은 건 아니었어. 그는 무척이나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거든.
지금부터라도 약물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릴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도 빼놓지 않았다고.
피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가라앉아 있었어.
‘에단, 절대로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게. 세상엔 종종 기적 같은 일들도 일어나는 법이거든.’
‘미안하네, 이렇게밖에 말해 줄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하네, 에단.’
의사이기에 자주 겪는 일일 텐데도 피터의 표정은 무척이나 괴롭고 슬퍼보였어.
젊은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은 베테랑 의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야, 리암.
그런데 말이야. 피터의 말을 듣고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난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어.
그리고 피터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내 눈을 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어.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지.
‘괜찮아요, 피터, 괜찮아요. 그러니 그런 표정하지 말아요, 난 괜찮아요.’
나중에야 든 생각이지만, 그때 피터에게 했던 말들은 정작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리암? 이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잖아. 우리가 살다보면 생길 수 있는 작은 우연 같은 일이잖아.
피터는 하루라도 빨리 치료 일정을 잡자고 말했지만 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했어.
병원을 떠나는 게 어쩌면 어리석고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냥 좀 쉬고 싶었어. 정말로 그냥 쉬고 싶었다고, 리암.
난 피터에게 최대한 빨리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퇴원수속을 밟았어.
그런데 말이야, 리암.
막상 메디컬 센터를 나오니 어디로 가야할 지 잘 모르겠는 거야.
텅 비어있을 내 작은 아파트나 케네 벙크의 부모님 집… 어디로 가든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것 같았어.
외로움과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내 모습 말이야.
한참을 망설이다 근처에 있는 OHSU waterfront park에 갔어.
날씨는 너무 맑고 화창했어. 따뜻한 햇살을 쬐며 벤치에 앉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든 채,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봤어.
혼자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누군가와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정말 혼자인 걸까?
사진첩 속, 유일한 흑백사진처럼 말이야.
그냥, 나를 알아봐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물론 처음 와 보는 이 낯선 공원에서 그럴 일은 없으리란 걸 잘 알지만 말이야.
그런데, 리암. 그 사실이 나를 너무 외롭게 했어.
점점 뿌옇게 변해가는 햇살, 흐릿한 나무 잎사귀와 경계를 잃어버린 공원길,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표정들…,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어.
리암,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울음소리가 자꾸만 내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어.
아주, 아주, 한참을 말이야.
“이봐.”
그러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어.
“이봐.”
다시 들린 목소리와 함께, 어느 손길이 내 어깨에 올려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어.
내 앞에는 하얀 은발에 두꺼운 안경을 쓴,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노부인이 서 있었어.
그녀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난 한 눈에 알 수 있었다고.
“내게 말해보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내 머리를 감싸 안아주며 묻는 노부인의 목소리가 애써 나 자신을 붙들고 있던 내면의 버팀목들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렸어.
아이처럼 터진 울음은 노을이 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난 내 상황과 감정들에 대해서 그녀에게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털어 놓았어.
그리고, 긴 침묵 끝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
“울지 말거라, 얘야. 죽음이란 게 그렇게 두려운 것도, 꼭 슬퍼해야만 할 일도 아니란다. 조금만 다르게 본다면 그것도 그냥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우리 가슴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순간 이곳이 텅 비어있는 것을 깨닫는 거란다.”
그녀는 주름진 손을 내 가슴에 가만히 가져다 댔어. 마치 이 속에 무엇이 들었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눈을 맞추며 내 어깨를 두드려준 그녀가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길 때, 난 깨달았어. 나와 함께 해준 내내 그녀가 보여준 미소는 더할 수 없이 눈부셨다는 것을 말이야.
아직도, 그녀는 여행 중일 거야. 그녀의 가슴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그녀의 삶이 좀 더 온전해지기 위해서……
리암,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 난 어딘가를 여행 중일 거야.
내게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무 걱정 말라고 친구, 그것이 꼭 두렵거나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4월, 포틀랜드 헤드라이트에서, 에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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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의 첫 번째 편지는 소설 『Elysium Mind』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전체 이야기는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