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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김밥 Jun 22. 2024

'수입 있는 백수'가 되어보자!

(고덕에서의 인생 후반 #3)

올해 초, 아파트 크기를 줄여 서울 강동구로 이사하면서 여유 자금이 생겼다. 당연히 아내가 이 돈을 통장에 넣어두고 관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나더러 굴려보라고 했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짐짓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투자해야 생활비도 얻고 자산도 불릴 수 있을까..."


나는 작년 1월부터 은퇴자로 지내고 있다. 평생 책상에서 조용히 일만 했고, 60세 정년을 9개월 앞두고 퇴직금과 함께 9개월 치 위로금을 받고 퇴직했다. 아내는 이 돈도 자신이 관리하고 싶어 했지만, 팽팽한 기싸움 끝에 생활비를 매달 지급하는 조건으로 내가 관리하기로 했다. (드디어 나도 돈을 좀 만져보는구나!)


퇴직 후 1년 동안은 구직수당과 개인연금을 받고, 부족한 건 IRP(퇴직연금) 계좌에서 인출해서 약속한 생활비를 만들어 아내에게 건넸다. 


직장을 그만두고 할 일 없이 지내는 건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내 정체성도 하루 루틴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누군가가 아내나 나한테 '뭐 하고 지내는가'라고 물어보면, '나는 뭐 한다'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시간을 때우며 지낸다고 우물쭈물 답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일머리도 없고, 사회성도 떨어지는 나는 딱히 취업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내 관심은 자연히 '수입 있는 백수' 되기에 쏠렸다. 생활비를 부담 없이 건네주는 백수가 되는 건 내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렇게 자산 관리는 내 새로운 직업이 됐다.


문제는 IRP 계좌에 들어있는 내 소중한 퇴직금을 어떻게 불려 나가는가였다. IRP 계좌에서는 개별 주식 종목을 매매할 수 없으니, 주로 저축은행 예금과 ETF 투자를 중심으로 해야 했다. 작년엔 다행히 미국 주식이 우상향 했다. 반면 국내 이차전지에 투자한 ETF는 손실을 봤다. 결산을 해보니, 다행히 퇴직금은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국민연금이 나오기 시작할 때까지 생활비를 넉넉히(?) 주면서도 퇴직연금 원금을 그대로 지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퇴직금을 화수분이나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미국 주식은 가끔 잠을 못 이루게 할 정도로 등락이 심했다. 새가슴을 가진 나는 과감한 성장주 투자도 못했다. 밤 사이에 ETF 가격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이 주식 투자로 재미 본다고 해서 따라 하면 꼭 손실을 보곤 했다. 파랗게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여주는 주식계좌는 이별을 예고하는 편지만큼이나 열어보기 힘들었다. 이차전지 ETF를 사서 많이 올라 수익을 보고 팔았는데, 더 오르는 것 같아 더 많이 다시 샀다가 지금까지 손실 중이다. 불교에서 '탐진치'를 버리라고 했는데, 주식투자들도 가슴에 새겨할 가르침이다.


평안하고 넉넉한 인생 후반을 위해서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고민이 깊었다. 


'수입 있는 백수'가 되기 위한 해법은 뜻밖에 찾아왔다. 아파트 다운사이징으로 확보한 여유 자금을 채권에 투자하면서 내 고민이 해소되었다. 아내가 허락한 여유 자금은 내 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실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에, 비교적 안전한 채권에 투자했다. 그런데 틈틈이 들어오는 채권 이자는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매달 들어오는 이자 덕분에 조급증과 결핍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자가 입금되었다는 카톡 알림을 받으면, 뭔지 모르게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진정제를 맞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추가된 투자금이 내 조급증을 치유한 셈이다. 돈으로 돈이 만든 문제를 해결한 꼴이다.


다행히 미국 주식은 올해도 우상향 했다. 미국 반도체 ETF를 더 많이 사둘걸 하는 아쉬움도 있다. 소중한 퇴직금이 아직도 줄지 않았다는데 만족한다. 초보지만 투자 활동도 하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갖게 되고 멘털 관리의 중요성도 깨닫게 된다. 


'수입 있는 백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시도해볼 수 있는 좋은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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