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에서의 인생 후반 #2)
6월 쾌청한 초여름 한낮에 설악산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올라섰다. 뚱한 표정으로 오른손에만 스틱을 쥐고. 장수대에서 출발해서 대승령(능선)에 올라선 다음, 귀때기청봉 정상을 거쳐 한계령으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어쩌다 길이만 7.6km에 달하는 거친 산길을, 그것도 햇살이 따가운 초여름에 걷게 되었을까? 그건 순전히 날씨 때문이었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이 계속되자, 나는 이 좋은 날을 그냥 보내기가 아까웠다. 불쑥 장수대로 가는 고속버스를 예매했고, 다음날 새벽 6시 반에 출발하는 첫차를 탔다.
아내는 귀때기청봉에 올라 털진달래를 보고 싶어 했다. 아내와 나는 설악산 봄철 탐방 제한 기간이 끝나자마자 설악산 한계령을 찾았다. 그러나 눈이 남아 있어 귀때기청봉 정상까지 가보지 못하고 하산을 해야 했다. 내가 그 한을 풀러 귀때기청봉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야~~" 탄성을 지르며 장쾌한 설악산 경관을 감상했으면 좋았겠지만, 생각보다 힘들고 시간도 지체되어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온 힘을 쏟았다.
귀때기청봉에 오르면서, 그럼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산 위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마치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본 것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내 모습을 보았다.
목적지 한계령은 출발지 장수대보다 고도가 높다. 그러니 장수대를 출발해서 한계령으로 가는 코스는 지속적으로 오르막이고 봉우리 몇 개를 넘어가야 했다. 등산을 같이 시작했던 다른 분들이 대승령에 오른 후 모두 남교리로 하산하는 코스로 방향을 잡을 때, 나는 홀로 귀때기청봉에 오르는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힘든 서북 능선 산행을 하는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고행승처럼 묵묵히 너덜길을 너덜너덜 올랐다.
- '되돌아갈까?'
이 생각을 떠올리는 자체가 사치였다. 생각만으로도 산행의 의미가 무너져 내릴 듯했다.
- '기어서라도 귀때기청봉을 넘어 한계령으로 간다!'
속으로 되뇌었다.
한계령으로 하산하고 나서야, 내가 귀때기청봉을 온몸으로 부딪쳐 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이름이 1408봉(1,408m)인 봉우리에 올라서서 바라본 귀때기청봉(1,578m)은 정말 아득히 멀었다. 막연히 상상했던 산 봉우리가 아니라, 잔뜩 웅크리고 먹잇감을 노리는 무서운 야수처럼 보였다. 순간 움찔했지만, 바로 그놈을 행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몸으로 부딪쳐 겪어보기 위해. 귀때기청봉 너덜길은 험해서 네발로 기어가기 일쑤였다. 정말 온몸으로 올라야 했다.
은퇴하고 조용하고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있다가 갑자기 떠난 산행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전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 앞으로 나가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내 인생 후반에 조직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뒤돌아보지 않는다. 지금까지 컴퓨터와 논리적 사고로 먹고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사람과 현실 세상에 몸으로 부딪히며 살기로 한다.
고덕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부딪쳐 보기"를 실천 중이다.
"별은 혼돈과 혼란 속에서 태어나지만, 일단 빛나기 시작하면 우주는 결코 예전과 같아질 수 없다. (Stars are born out of chaos, and a whole lot of mess. But once we start shining, the universe is never quit the same again.)"
- 넷플릭스 시리즈 <Geek Girl> 중에서
"아직 부딪쳐 보고 싶은 세상이 많사옵니다. (There is still an entire world out there that I wish to face.)"
- 김혜수가 출연한 드라마 <슈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