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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김밥 Jun 20. 2024

판교와 고덕, 어디가 더 좋아?

고덕에서의 인생 후반 #1

올해 2월에 판교에서 고덕으로 이사 왔다.

고덕은 내가 인생 후반을 살아갈 동네였다.

서판교에 15년 동안 살면서 수원에 있는 직장을 다녔고, 두 아들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보내며 키웠다.

퇴직 후 1년 후에 고덕으로 이사했고 아들들은 독립을 했으니, 고덕에는 다닐 직장도 아들들도 없다.


서판교는 조용하고 쾌적한 곳이었다.

사회생활 하면서 어디에 사느냐고 물어오면, "서판교요"라고 답하면서 꼭 한마디 덧붙였다. "아~ 전세로 살아요."

내 월급은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입금되어 그 흐름을 알지 못했는데, 아마도 매번 오르는 판교 전세금을 모으는데 쓰였을 것 같다.

2층이어서 거실 통창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보이고, 운중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어디 펜션에라도 온 것 같이 새하얀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집을 가꾸는 데 정말 진심인데, 판교는 그런 면에서 정말 만족스러운 주거지였다. 전세라는 것만 빼면.


고덕 아파트는 우리 소유다. 거실 밖으로는 옆동과 앞동 회색벽이 가득 보인다. 처음 거실밖 모습을 보고는 우리 둘 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아내에게 고덕동은 제사나 명절 때마다 음식을 바리바리 만들어 억지로 들려야 하는 '시댁'이었다.

외아들(무녀독남)인 나는 어머니와 아내가 갈등할 때마다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니 아내에게 고덕이 기분 좋은 곳일 리 없다.


우리 부부는 지금 고덕에서 산다.

판교와 고덕, 어디가 더 살기 좋은 곳일까?


판교는 멋진 거실 통창 풍경을 가졌지만, 고덕은 설거지뷰로 고덕대교가 보이고 뒷방에서도 구리 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비교항목을 고르고 점수를 매기고 가중평균을 구해야 할까?


아파트 가격만 비교하자면 판교가 2억 정도 비싸다. 판교는 43평이었고 고덕은 34평이다.

나는 고덕이 더 좋다. 판교 전세금을 빼서 채권을 산 덕에 그 이자로 생활비 일부를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덕은 집 크기가 적당해 청소가 쉽고, 동선도 깔끔하고 편리하다. 반면 판교는 집이 길어서 청소도 동선도 불편했다.


판교에는 판교도서관이라는 훌륭한 문화시설이 있었고 판교청소년수련관에서는 수영도 했다.

고덕에는 고덕평생학습관에서 책을 빌리고 단지 커뮤니티센터에서 수영도 하고 가까이에 서울시민대학도 있어, 아쉬운 점은 없다.


판교에서 나는 운중천을 따라 길게 산책을 했고, 아내는 뒷산에 오르는 산책을 했다.

나는 일정한 경로를 따라 사람 구경도 하며 이 생각 저 생각하며 걷는 걸 좋아했고,

아내는 흙길을 따라 조용히 걷는 것을 좋아해서, 서로 따로 산책을 했다.

따로 산책하다가 가끔 집 근처에서 마주치면 왠지 어색했다.


그런데, 고덕에 와서는 거의 매일 맨발 산책을 같이 한다.

맨발 걷기가 가능한 세족 시설과 모랫길이 있는 하남시 '나무 고아원', '한강 뚝방길'에서 2시간 동안 같이 걷는다.

이 길은 탁 트인 한강뷰와 나무숲 터널과 아담한 카페와 주말농장까지 곁에 보이는 환상적인 산책길이다.

흙길을 걷고 싶은 아내와 사람 구경도 하고 생각에도 잠기고 싶은 나, 모두를 만족시킨다.



고덕으로 이사 온 뒤로 판교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잊혔다.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고덕은 '맨발 걷기' 좋은 자연환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로 고덕이 판교에 판정승일까? 아니면 KO 승일까?


비교를 요약하자면, 세련된 도시 판교에서 전원마을 고덕으로 이사 와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고덕은 남양주, 북한강, 팔당, 양평, 가평, 춘천 등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는 곳들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은퇴한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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