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투어 슈니츨러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지하배우 목소리로 듣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 문장은 흔히 안도의 뜻으로 쓰인다. 증인이 사라졌으니 진실도 함께 묻혔다는 의미로, 이제 남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면 된다는 선언처럼.
하지만 밀리의 서재에서 배우 이지하의 목소리로 이 소설을 듣는 동안, 이 문장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의 머릿속은 끝내 조용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려달라는 기도, 죽어달라는 기도
불륜 상대와 함께 마차 사고를 당한 여자. 연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그녀만이 살아남는다. 비를 뚫고 집으로 도망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성과 본능이 뒤엉켜 쉼 없이 충돌한다.
처음엔 인간적인 본능이 앞선다. 혹시 그가 살아 있다면, 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곧이어 사회적 공포가 밀려온다. 불륜이 들통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
마침내 그녀는 도망치며 기도한다.
그가 깨어나지 않기를.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를.
그가… 죽어 있기를.
살기 위해, 사랑했던 사람의 침묵을 바라게 되는 순간. 그 장면을 따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기만적인 평온
그 치열한 생존의 질주 끝에,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옷을 갈아입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일상을 이어간다. 그리고 남편과 마주 앉는다.
남편이 먼저 말한다.
"당신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몇 년에 걸쳐 쌓여온 모든 것을, 이제는 곧장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런데 바로 그때,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천천히 방을 나간다. 그리고 그 짧은 공백의 시간 동안,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기묘한 감정이 찾아든다.
평온.
공포도 아니고 수치심도 아닌, 마치 많은 것들이 좋아질 것만 같은 커다란 평온.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고백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용서도 파국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을까. 곱씹을수록 그 평온의 정체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작가가 끝내 써주지 않은 문장
그 평온은 "말해서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다. "말할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에 스스로 안도해 버린 상태다.
현실은 여전히 시한폭탄처럼 그 자리에 있는데, '나는 이제 정직해지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자기 평가가 잠시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그녀는 말했기 때문에 평온해진 것이 아니다. 말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에 평온해졌다.
그리고 작가는 잔인하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끝낸다. 그녀가 실제로 남편에게 고백했는지, 아니면 그 기만적인 평온에 기대어 다시 일상을 연기했는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이 불안해진다. 작가가 써주지 않은 단 한 문장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자기기만 속에서 평온해진다.
당신이라면, 그 평온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