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 아니라 용기를
불안은 대개 형체가 없다.
퇴직 3년 차, 자유라는 이름의 시간이 처음엔 달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정체 모를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거창한 위기는 아니었지만, 매일이 비슷하게 흘러가고 나만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묘한 공허함이었다.
그때 만난 김익한 교수의 'AI 기록학'은 나에게 뜻밖의 처방전을 내놓았다.
"자유로운 삶의 주관자로 살고 싶다면, 다 떠나서 먼슬리 다이어리부터 쓰세요."
그 말이 내 마음의 빈구석에 툭 와닿았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작년 10월, 펜을 들었다.
기록은 안개를 걷어내고 내 마음을 눈앞에 선명하게 꺼내놓는 과정
AI 기록학에서는 내면의 잠재된 생각인 '암묵지'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을 성장의 시작이라 말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을 어떻게 보낼지 플래닝을 하고, 일과 중에는 한 줄 메모를 적었다.
"인왕산 자락길을 산책함. 고요함이 좋았음." 과 같은 식이다.
내가 한 일과 그 때의 감정을 키워드로 남기는 아주 작은 행위.
그리고 잠들기 전, 4L 관점으로 하루를 회고하고, 나 스스로를 칭찬하기와 감사하기를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4L이란 오늘 좋았던 것(Liked), 배운 것(Learned), 부족했던 것(Lacked), 그리고 바라는 것(Longed for)을 적는 일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오늘 뭐가 좋았지? 뭘 배웠지? 아쉬운 건 뭐고, 내일은 어땠으면 좋겠지?"라고 나에게 다정한 질문을 네 번 던지는 일과 같다.
이 질문에 답하다 보면, 그냥 흘려보낼 뻔한 하루 조각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 채 나란히 놓인다.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묵직하게 찾아왔다. 삶의 밀도가 달라진 것
판타스틱한 성공이 찾아온 건 아니지만, 저녁이면 "오늘 하루 참 충실하게 살았다"는 충만한 기분이 차올랐다.
더 신기한 건 수면의 변화였다. 잠자리에 누우면 온갖 생각에 뒤척이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록을 통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고민과 감정들을 종이 위로 고스란히 옮겨 적자, 비로소 나의 뇌도 안심하고 휴식을 선택한 것이다.
머릿속 청소를 끝내니 잠자리도 그만큼 개운해졌다.
기록한다는 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내 통제권 안에 두겠다는 주관자적 선언과 같다.
퇴직 후의 불안은 내가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흘려보내고 있다는 감각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매일의 작은 기록은 그 흐름을 멈추고 나만의 질서를 세우게 했다.
초보 기록가의 고백
이제 겨우 7개월 차에 접어든 초보 기록가인 나는, 여전히 기록을 빼먹는 날도 있고 칸을 채우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 인생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매일의 일상을 조금씩 편집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록된 하루는 결코 증발하지 않으며, 단단한 자산이 되어 나의 내일을 지탱한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일단 적어보는 것, 그것이 오늘을 충만하게 살아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임을 나는 서서히 믿으며 나아가고 있다.
오늘의 기록 질문
"오늘 밤, 꿀잠을 자기 위해 종이 위에 딱 하나만 적어서 남겨두고 싶은 생각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