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6 - 아이슬란드(1)
사실 오래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오로라 보기'가 꽤나 높은 우선순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유럽 땅을 밟으며 기필코 오로라를 보고 오겠다는 다짐이 드디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신비로운 자연의 땅, 아이슬란드에서.
아이슬란드 여행은 계획을 세우는 단계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면허증이 있었지만 유럽에 와서 운전을 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면허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아이슬란드를 제대로 보려면 꼭 차를 렌트해서 다니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투어로 아이슬란드에서 보고 싶은 것들을 다 보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고, 그렇다고 짧게만 다녀오기에는 항공권이 아까웠다. 결국 유랑을 통해 동행을 구하여 우리 학교 사람 3명과 다른 한 명 , 총 네 명이 차를 렌트하여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여행 날짜가 1달도 안 남았을 무렵, 갑작스럽게 동행분께서 연락을 하셨다. 못 가게 되었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비행기표는 사놓은 상태였고, 우리 중에 국제 면허증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랑에 다시 우리의 일정을 올리고 동행을 구했다. 며칠이 지나고 두 분께서 연락을 해주셨고, 정말 다행히도 2명의 새로운 인연과 함께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차까지 렌트해서!
꽃보다 청춘에서 자갈이 튀어 유리창이 깨진 걸 보고 처음엔 겁이 조금 났지만 아이슬란드의 도로는 전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보다 차도 훨씬 적게 다니고 길도 직진이 많아서 별다른 무리 없이 첫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하루 늦게 도착하는 성원이 형을 기다리는 겸, 첫날은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를 둘러보았다. 레이캬비크의 첫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알록달록 예쁜 집들에 추위를 잊게 해줄 활기찬 분위기의 거리, 눈 쌓인 가로수 등을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도시가 내뿜는 고요한 분위기 탓에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지는 듯하다.
레이캬비크에서 몇 안 되는 관광명소 중 하나인 할그림스 교회를 찾아갔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교회 중 하나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생각보다 평범하다고 느껴졌다. 웅장한 맛은 있는데, 웅장하고 큰 교회라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으니... 건물의 독특한 외벽은 주상절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디자인한 것이라 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레이캬비크 시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개성 넘치고 알록달록한 집들이 모여 있어서 마치 미니어처 같은 느낌을 준다.
교회에서 내려와 유명하다는 핫도그 집에서 핫도그도 먹고 하르파라는 건물에도 들어가 보았다. 하르파에서는 때 마침 진행되고 있던 체스 경기를 별생각 없이 구경하고 나왔다. 이 두 가지 정도를 보고 더 이상 레이캬비크에서 무엇을 할지 몰랐던 우리는 생각보다 작고 볼게 없던 이 작은 수도에 실망했고, 거닐었던 거리를 거슬러 되돌아 왔다. 그때는 '핫도그'와 '체스'가 이번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키워드가 되리라는 걸 미처 몰랐다.
다음날, 성원이 형의 합류로 드디어 다섯 명이 되었다. 다섯 명과 짐들이 잔뜩 실려진 차 안에서는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고, 뒷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드디어 온전히 모인 우리들은 어색했던 첫 만남을 제외하면, 정말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는 약 6일 동안 아이슬란드 남부를 돌아보기로 계획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거리를 달려야 했다. 아침부터 달려서 구경하고, 또 한참을 달려서 구경하고 하는 식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중간에 적당한 식당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고 점심마다 외식을 하는 게 가격도 만만치 않기에, 우리는 아래와 같은 해결책을 찾았다.
아, 짧고 굴게 표현하자면, 이건 정말 맛있다.
핫도그 빵과 소시지, 양파, 케첩과 머스터드 그리고 바비큐 소스까지. 들어간 게 많지는 않지만 이 핫도그는 내가 먹어본 핫도그 중에 제일 맛있는 핫도그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핫도그 빵을 굽고 양파를 볶고, 소시지를 익히며 핫도그를 만들었다. 아예 마트에서 큰 플라스틱 통을 사서 인당 2개씩, 총 10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경치 좋은 곳에 걸터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먹었다. 우리의 여행에서 낭만과 식비를 책임져준 고마운 핫도그. 다음번에 다른 사람들과 아이슬란드를 다시 오게 된다면 꼭 이 핫도그를 만들어주고 싶다.
온전하게 모인 다섯 명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블루라군이다. 파란색의 빛깔이 참 신비로운 아이슬란드의 유명한 온천이다. 숙소에서도 따듯한 물을 틀면 유황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온천수를 따듯한 물로써 그대로 사용하는 것 같다. 독특한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따듯한 물까지 자연이 그대로 제공한다니, 이 곳 사람들은 참 자연의 덕을 많이 받는다. 과거에 어떤 덕을 쌓았길래.
블루라군에서 한참을 노는 동안 내내 흐렸던 날씨가 잠깐 맑아졌었다. 맑고 깨끗한 파란 하늘 아래, 적당히 따듯한 물에서 하는 온천욕은 사람을 참 편안하게 만든다. 나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이때 사과를 한다면 정말 쿨하게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핸드폰이 젖을까 봐 사진을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게 조금 아쉽지만 그 상쾌한 기분은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블루라군에서 온천을 기분 좋게 마치고 다시 레이캬비크로 돌아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 사치를 부렸다. 인당 4만 원가량의 스칸디나비아식 생선요리, 고기 요리 등을 맛있게 먹으면서 남은 여행 동안 별 탈 없이 재미있게 지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바랐다.
밤에 보는 레이캬비크는 낮의 모습과 조금 달랐다. 이 정도가 10대 교회 일리가 없다고 무시했던 할그림스 교회도 조명과 함께 있으니 훨씬 아름다워 보이고, 전망대도 낮에 본 모습 보다 더 예뻤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조명의 색이 마치 오로라를 연상시킨다.
본격적인 아이슬란드 여행은 레이캬비크를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17일 아침이 밝았고 우리는 핫도그를 챙겨서 스나이펠스네스반도로 출발했다. 2시간가량을 꼬박 달려 도착한 우리의 숙소는 숙소를 제외하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위치해있었다. 이렇게 탁 트이고 주변에 불빛도 없는 장소에서 자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모두가 환상적인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들떠 있었다. 날씨 예보를 보니 웬일로 오늘 저녁엔 하늘이 맑다고 한다. 오로라가 보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별은 쏟아지지 않을까.
무거운 짐들과 함께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우리의 들뜬 마음까지 숙소에 차분히 내려놓고 커크주펠 산으로 향했다. 산으로 가는 중간중간 경치가 예뻐서 내려서 사진을 찍고 나면 신기하게도 100m 정도 후에 꼭 포토존이 있었다. 사람들 생각이 다 똑같구나, 지금 아름다운 이곳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뻐 보이는구나.
오른쪽에 있는 작은 산이 커크주펠 산이다. 산의 형성과정이 적혀있는 안내판이 있었지만 아이슬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적당히 그림만 보고 이해했다. 아이슬란드 엽서나 공항에서 이 산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주로 은하수와 함께 나온 사진들이 많다. 은하수와 함께 보지는 않았지만, 굳세 보이고 듬직해 보이는 모양새가 왜 이 산이 작은 규모임에도 유명한지 알려주었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달려서 커크주펠 산을 빙 둘러가다 보니 커크주펠 폭포가 나왔다. 아이슬란드에 와서 거의 처음으로 본 폭포여서 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실 앞으로 볼 폭포들에 비하면 대단한 폭포는 아니었지만 커크주펠 산과 나란히 있는 모습이 마치 형제나 오누이 같이 느껴져서 보기 좋았다.
열심히 달려온 탓에 가득 차 있던 기름도 반 이상 줄었다. 올라프빅(Olafvik)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여 차에는 기름을 채우고, 우리는 핫도그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때마침 날씨도 맑아지면서 핫도그를 먹으며 바람을 쐬는 나의 기분은 최고였다. 내가 여행을 온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은 박물관을 보거나 성을 둘러볼 때보다 지금처럼 밖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소소한 점심을 먹을 때 더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점심도 먹고, 기름도 채운 뒤에는 스나이펠스네스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어디서부터 국립공원인지 몰랐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는데, 날씨도 완전히 맑아지면서 이 아까운 경치를 놓치기 싫어 차에서 자주 내렸다. 자주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모두들 멋진 사진을 남겨보겠다는 욕심에 한 번 내리면 좀처럼 다시 차에 올라타지를 않아서 예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 구경했다.
남자 다섯 명의 조합치고는 스나에펠스네스 국립공원에서 꽤 오랜 시간 사진놀이를 하고 다음 장소인 Djúpalónssandur(듀팔론산두르?)에 도착했다. 국내 블로그나 여행기들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것 같지만 영일이가 아이슬란드 투어들이 들르는 곳이라고 하여 우리도 일정에 포함시켰다. 신기한 모양의 바위들과 거센 파도를 보고, 우리는 또 한번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보다 청춘에서 레이니스 파라의 파도를 보고 다들 엄청나게 신기해하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바다를 많이 안 가봐서 저러나 싶었는데, 이 해변에 서서 몰아치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그런 반응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온다. 파도에 왜 놀라는지 정말 와본 사람만 알 듯하다.
니스 해변의 파도가 한껏 여성스러움을 뽐내며 장난스럽게 다가오는 파도였다면, 이곳의 파도는 마치 털이 북실북실한 바이킹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는 것 같다. 물살에서도 힘이 느껴진다. 거기에 해변은 경사가 낮아서 물이 굉장히 빨리 들어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한참 멀리서 왔다 갔다 하던 파도는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서 들이닥쳐 모두를 놀라게 한다.
파도와 장난을 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우리는 점심에 먹었던 핫도그가 다 소화될 때까지 그곳에서 놀았다. 바보 같은 영상을 찍기도 하고, 파도를 겨우 피해서 헉헉대는 효진이를 보고 깔깔대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뛰고, 신나게 놀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 열심히 놀았던 탓인지, 차에 타고 금방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이미 숙소에 도착해 있었고 여전히 하늘은 맑았다. 꿈에 그리던 오로라를 드디어 보게 될까. 오늘 또 하나의 버킷 리스트를 지우게 되는 건가. 불침번을 서다가 오로라를 보았을 때 터져나오는 반응이 어떨지 서로 연기하면서 설레는 저녁시간이 흘렀다.
저녁을 먹고 하늘을 내다보는데 느낌이 좋지 않다. 분명 예보에는 하늘이 맑다고 되어 있었는데 딱 우리 숙소를 경계로 뒤쪽은 구름이 가득 깔려있었다. 방향으로 보나 이동하는 속도로 보나 1시간 이내로 하늘을 온통 뒤덮을 기세였다. 오늘 너무 멋진 것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하늘이 쉽게 하늘을 내어주질 않는다. 밀려드는 속상함을 숨기기 어렵다. 오늘처럼 완벽한 숙소는 다시없을 텐데.
차라리 아까 맑지나 말지. 기껏 준비한 별자리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희망 고문하는 하늘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렇게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 숙소에서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가 새벽에 깨서 밖을 내다보았지만 하늘은 우리가 간절히 바란다고 우리 뜻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곳엔 딱 우리 다섯 명과 자연밖에 없었다. 인터넷도 안되고 유달리 이 주변에서 마주친 사람도 없다. 속세에서 우리와 연결되어 있던 것들이 모조리 끊어진 듯했다. 사람들과 인터넷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자연과 밤하늘과 바람에 가까워지는 밤이다.
다음날 아침,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큰 기대가 무너져 싱숭생숭했던 어젯밤의 감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무렇지 않다.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골든 서클로 향했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온 사방이 안개로 가득했다. 도로 양 옆으로는 눈까지 내려앉아 도로를 빼고는 온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젯밤의 못된 구름이 오늘은 나름대로 멋진 풍경을 만든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에서 간단하게 사진을 찍은 후 조금 더 달려 게이시르 간헐천에 도착했다. 크고 작은 구멍에서 연기가 계속 솟아나고 있었다. 작은 실 하천처럼 흐르는 온천수를 보고 호기심이 생긴 성원이 형은 잠시 손을 대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너무 뜨거워 놀라고 나서야 바로 옆에 80도라는 표지판과 만지지 말라는 팻말이 보였다.
게이시르에서 가장 유명한 간헐천인 strokkur geyser 앞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도 그 주위를 동그랗게 에워싸고 카메라를 든 채 간헐천이 터져나오길 기다렸다. 물속 깊은 어딘가에서 공기방울이 올라오거나 출렁일 때마다 사람들도 덩달아 술렁였다. 2분 정도가 지나고 한 번 크게 꿀렁이더니 순식간에 물이 터져나왔다.
그 뒤로도 자연이 만들어 낸 이 거대한 인공분수를 5번 정도는 더 구경한 것 같다. 저 많은 양의 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원리가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접고 솟구치는 물기둥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돌아오는 길, 거대한 물기둥의 규모에 놀란 우리들은 누군가 실내에서 관광객들 호응을 봐가면서 주기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도 했다.
그다음으로는 굴포스에 도착했다.
대체 이 많은 물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걸까. 솨아-하는 폭포 소리에 머리 속도 점차 하얗게 된다. 무서운 기세로 떨어지는 물과 그 주위로 피어난 희뿌연 물안개. 끝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물줄기를 내리꽂는 굴포스는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웠다. 저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다. 좀 더 가까이에서 폭포를 보기 위해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얼음이 살짝 녹아서 굉장히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발을 내딛으며 조금씩 굴포스에 다가갔다.
멋지다. 가까이에서 보나 멀리서 보나 참 멋진 풍경이다. 이 멋진 풍경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모두가 말을 아꼈다. 대자연의 위엄을 한껏 뽐내는 굴포스를 마지막으로 골든 서클 투어를 마쳤다.
오늘의 숙소도 불빛 하나 없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이미 하늘한테 한 번 데었던지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맑은 하늘을 보면 좋은 거고, 못 봐도 충분히 눈호강을 많이 했으니 괜찮고. 숙소는 정말 좋았다. 당구대도 있고, mp3와 연결하여 음악을 들을 수도 있는 오디오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예쁘게 놓여 있는 체스판에서 2:2로 대국도 두고 (다들 잘 못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던지...) 맥주 한 잔과 함께 별 탈 없이 재미있게 보낸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 그나저나... 돌아가기 전까지 오로라를 볼 수 있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