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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숟가락 Feb 05. 2023

이방인이 내는 입장료

필리핀 보홀 여행기 1

  갑자기 잡은 가족 여행이었다. 2022년 마지막 날 짧게 가까운 일본을 가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일본 여행 패키지 가격에 조금 더 보태서 더운 곳을 가는 것이 어떠냐, 그럼 안 가본 곳을 가자까지 이어져 결국 보홀 직항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여행은 처음부터 긴장감이 넘쳤다. 발권하는 중 필리핀에 가려면 e-travel을 써야 하는 것을 알게 됐고, 그 과정이 꽤 길고 복잡했다. 긴장해서 떨리는 손가락은 실수를 자주 했고, 두 아이의 것도 작성해야 해서 결국 비행기 출발 27분 전에야 비행기표를 받았다. 그때부터 45번 게이트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지난겨울 아이들에게 보여준 ‘나 홀로 집에 2’의 한 장면이 그대로 재연되었으나, 케빈의 부모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막내를 잘 챙겼다. 영화가 주는 교훈 덕분에 나를 비롯한 많은 부모가 공항에서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헐레벌떡 게이트에 도착한 시간은 출발 1분 전! 닫힌 게이트를 보고 "우리도 있어요!"라고 외쳤는데, 비행이 연착되어서 아직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민망함이 느껴졌으나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15분 후 3년 만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요금이 저렴해서 예상은 했으나 비행기의 공간은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깊은 숨을 쉬면 앞자리가 움직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옆 사람과 몸이 닿는 구조였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구조에서 5시간을 버텨내기는 쉽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팟캐스트, 전자책, 미드, 영화 등으로 간신히 시간을 때웠다.


  2023년 1월 29일 새벽 2시 45분 팡라오(Panglao) 국제공항에 내렸는데, 공항 크기가 우리나라 전철역만 했다. 클룩으로 예약한 교통편으로 15분 정도 걸려 솔레아 리조트(Solea Resort)에 도착했다. 317호에 배정받아 대충 먼지만 제거하고 잠에 들었다. 4시간 정도 잠을 자고 깨서 본 창밖 풍경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음을 실감하게 했다.


보홀에서 아침


  조식을 간단히 먹고 수영부터 때렸다. 수영장 앞에는 조그만 비치가 있었는데, 호텔 사유지를 벗어나면 호객꾼들이 붙는다. 진주 목걸이와 팔찌를 파는 필리핀 청년이 ‘silver! 진주!’라고 외치는데 슬쩍 봐도 녹이 슬었다. 그래서 “I’m sorry. I don’t have money now”를 계속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오는데 ‘짜증’을 내지 않기 위해 계속 마음을 다스렸다. 무시하지 않고 거절하는 좋은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아름다운 나라에 이방인으로 방문한 것인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라면 입장료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1달러를 주고 조잡한 귀걸이를 샀다. 그러면서 그 청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몇 살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를 물으면서 대화를 텄다.


  그는 자기 팔에 새긴 타투를 자랑하면서 “이것은 타투이스트인 형이 공짜로 나에게 해 준거야”라고 자랑을 했다. 그 말속에는 ‘비록 자기는 여기서 하찮은 물건을 팔고 있지만, 내 형은 나와는 다른 좋은 일을 하고 있어’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 외에도 ‘한국인은 친절한데, 일본인은 좋지 않고, 미국인은 더 나쁘다’라는 그의 경험에 토대를 둔 국제 인성 순위를 알게 되었다. 물건을 팔아 준 것에 대한 접대성 멘트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변 호텔에는 없고 한국인이 많이 머무는 이 호텔 앞에서만 물건을 팔고 있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빈 말만은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끝내고 기분 좋게 “See you, tommow”로 인사를 나누며, 낯선 곳에서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17세 필리핀 청년을 알게 되었다.


필리핀 청년에게 산 1달러 귀걸이

  그러나 다음 날 내가 호구라고 소문이 났는지 청년의 친구들이 나에게만 집요하게 붙어서 물건을 파는 건 단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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