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 탐방 여행기
나는 조선일보가 싫지 않은데?
6월 말 구리에 있는 처가댁에 갔다. 장인어른이 갑자기 물어보셨다.
“정서방! 조선일보에서 하는 한민족사 탐방 신청했나?”
“예?”
“내가 신문 보다가 정미(장인어른 딸)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면서 정서방에게 전해주라고 했는데…”
처음 듣는 얘기였다. 배우자를 쳐다봤다.
“나는 자기가 조선일보 싫어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지 않았는데? 신청할 거야?”
황당했다. 내가 조선일보를 싫어한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아내는 내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 혼자 방학에 여행을 보내주기 싫어서 그런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설명했다.
“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 않아. 사실을 알아본 후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신문은 각 기사를 보고 판단하지, 어떤 신문사가 썼다고 무조건 믿거나 불신하지 않아.”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과 관련된 역사와 취지를 읽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다. 답사를 경험하면 한일 관계사에 대한 눈이 생길 것 같았다. 바로 신청서를 작성해서 보내고 좋은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배우자가 나를 속단했듯이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비슷하다. 식민 지배의 역사가 한-일 간의 모든 관계를 잠식하고 있다. 학생들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수업에서 거침없이 드러냈고, 그것에 대해 교사인 나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내용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답사를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직접 판단하기 위한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고자 했다.
한반도와 일본은 긴밀한 사이였다.
답사를 통해 처음 깬 고정관념은 한일 간의 관계였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한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었고, 중세에는 서로 다투었으며, 근대에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였다’라는 내러티브로 한일 관계사를 설명한다. 내가 이번에 전체적으로 느낀 한일 관계는 ‘싸우면서 친해진 사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숙소인 ‘아카마 신궁’을 보면서 화해를 하는 방식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제14대 이삼평을 만나면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일본에 널리 퍼지게 한 조상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후나야마 고분에 전시된 유물들은 백제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지금 심정적으로 멀리 있는 일본이지만 과거인들이 남긴 유물들은 우리가 긴밀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 지배의 경험은 이전까지 두 나라가 만들어왔던 관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2014년 8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 집회’에 갔을 때 찾았다. 그날 일본의 시민단체 사람들이 와서 직접 사과하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로했다. 머리로 무언가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일본인 모두를 한국의 식민 지배를 찬성한 사람들로 보고 있었다. 인간을 하나하나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객체로 본 것이 아니라 무리로 생각한 것이다. 일본에도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물론 지금 권력을 잡은 ‘아베 정권’은 평화 헌법을 수정하면서 침략 의도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일본인들도 많다.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의 국적이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서로 묻고 생각이 같다면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일본’을 미워하고 있다.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삼으면 과거사 문제는 더욱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잘못은 스스로 깨달아야 고칠 수 있다. 옆에서 아무리 잘못이라고 이야기해도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면 사과를 했더라도 그것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현재의 일본인들이 과거 ‘일제의 군국주의’를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진심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본 내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다수의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일본 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줘 그들 내부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들이 다수가 되었을 때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있을 수 있다.
일본은 과거에 대국을 꿈꿨다.
일본의 문화에 대해 보통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특징을 가졌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본 일본의 문화는 거대했다. 동대사의 대불은 보고 있는 사람을 압도하였고, 이조성과 오사카성의 건물들은 위세가 대단하였으며, 다자이후의 초석들은 큰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거대한 이시부타이 고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소가씨를 상상할 수 있었고, 요시노가리 역사 공원에서 야요이 시대 대규모 취락 시설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문화는 화려함도 갖추고 있었다. 건물들은 갖가지 조각을 품고 있었고, 금을 입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상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류지에서 만난 십일면천수관음상은 갖가지 보물들을 손에 쥐고 있었고, 호류지의 옥충주자에서 뛰어난 화공의 솜씨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본 일본 문화의 이러한 특징은 고대 시기 일본이 대국을 향한 자신의 꿈을 문화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은 동아시아 구석의 섬나라로 고대에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열등감이 임진왜란 시기 대륙을 점령하겠다는 무모한 시도로 귀결되었다.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전개한 ‘탈아론’은 서양을 닮아 아시아의 맹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따라 해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게 되었다.
대국은 물질적으로 큰 것만을 추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약자를 배려하고, 정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가진 것이 많으면 큰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큰 사람이 된다. 역사는 숨기고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역사를 통해 배우고 명심해야 하는 점이다.
일본은 과거를 소중히 생각했다.
호류지 백제 관음은 우리나라에 없는 목조 관음상이다.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걸 봐서 불상의 나이가 적어도 1,300살은 된 듯한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함은 물론 광배까지 남아있다. 재료가 나무면 불타기도 쉬웠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을까? 대륙과 떨어진 섬나라여서 외부의 침략이 적었고, 일본인 특유의 조심성을 이유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답사를 하면서 찾은 해답은 ‘일본은 과거를 소중히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문화유적은 관광지가 되어있다. 유명한 절 앞에는 수많은 식당, 기념품점, 술집 등이 즐비하다. 고즈넉한 절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찾은 사람들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형형색색의 간판들 때문에 실망한다. 문화재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 되고 관람객은 소비자로 여겨진다.
반면 일본의 문화 유적지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만이 느껴졌다. 아카마 신궁과 일청 강화 기념관에서는 자판기 몇 개만 있었고, 식당조차 박물관처럼 보여 들어가는 답 사원들이 많았다. 아스카 테라에 가는 길은 차 한 대만이 갈 수 있는 비좁은 도로만 있었고, 호류지에서는 말조차 조심하게 되는 분위기였다. 이삼평 도예지 앞에 있는 도자 가게들조차 작은 소품들을 진열해 놓아 전시장 같이 느껴졌다.
이것은 과거를 대하는 철학과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답사 동안 방문한 곳에서 일본이 과거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불상들은 처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복원한 건물들도 예전 모습을 섬세하게 재연해 놓았다(물론 오사카성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지만). 지금 사람들의 생각대로 문화 유적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감정 이입하여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콜링우드가 말한 ‘추체험(enactment)’의 방법을 문화유산 복원에 적용하는 것 같았다. 또한 문화 유적지에서 만난 일본인들도 이러한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인 관람객들이 유물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과거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전 의정부 역사교사 모임에서 남산 답사를 했을 때 식민지 시기의 ‘조선 신궁’터를 발굴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순간 스친 생각은 ‘식민지 유물을 발굴할 필요가 있나?’였다. 가만히 멈춰 서서 다시 생각했다. ‘식민지 시대 유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유적의 보존과 발굴을 통해 일제의 침략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일제의 잔재를 철저히 파괴해 치욕의 역사를 잊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쪽을 택하든 ‘일제’와 ‘일본’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지배가 이루어졌고, 폭력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유린당하였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군국주의를 지향했던 당시의 세력과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현재의 일본인들이다. 일본이 만든 문화재를 없앤다고 해서 식민 지배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과거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떤 역사든지 복원해야 한다. 불행한 역사라도 현재 우리들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확인하지 않고 변하기 위해 떠난다.
어느 책에서 봤다. 지금 우리가 하는 여행은 확인하러 가는 것 아니냐고. 로마에 콜로세움이 잘 있는지, 경주에 석굴암이 그 자리에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여행지에서 나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나고야 성터에서 크고 작은 돌들의 어울림, 아카마 신궁 박물관 옆에 있던 악기를 연주하던 불상의 표정, 동대사 관음보살의 옷의 흘러내림, 아스카 테라에서 본 작은 불상의 미소 등 책이나 자료에 나오지 않는 과거인의 숨결을 찾고자 했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다시 생각하고자 했다.
답사 후 나는 분명히 바뀌었다. 단순히 문화재를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났다. 먼저 개인적인 감정이 일어났다. 결혼 후 처음으로 5박 6일 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딸과 아내, 그녀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을 학생들과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누구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사진을 다시 찍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느낀 일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답사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명확하지 않은 일본에 대한 감정들이 정리가 되었다. 이제 수업에서 내가 본 일본에 대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