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다

<추락의 해부> 불완전한 언어가 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

by TAFO

프롤로그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10편의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 안의 생각들을 리팩토링하며 이 기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렸다. 그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네버엔딩 스토리가 아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총 4권의 볼륨, 딱 40개의 글로 완성되는 유한한 프로젝트다.


Vol.1 차가운 코드로 뜨거운 삶을 짓다

나를 세우는 태도.
현실 인식, 시스템 구축, 그리고 생존.


Vol.2 차가운 기계의 물성과 뜨거운 리듬 사이

감각을 조율하는 리듬.
기계공학적 미학, 전략적 휴식, 그리고 심장 박동.


Vol.3 유한한 삶, 무한한 해상도

내면을 파고드는 사유.
언어와 데이터, 아날로그의 마찰력, 그리고 본질.


Vol.4 무너지지 않는 관계의 아키텍처

타인과 연결되는 설계.
관계의 프로토콜, 견고한 시스템, 그리고 공존.


이제 나는 두 번째 챕터, Vol.2의 문을 연다.


이곳에서는 0과 1의 논리를 잠시 내려놓고, 손에 잡히는 물성과 귀에 들리는 진동의 세계를 탐구할 것이다. 차가운 금속 안에 담긴 공학적 완벽함부터, 20대의 뜨거운 열정이 남긴 불규칙한 리듬까지.


그 시작은 ‘진실’이라는 가장 모호한 대상을 다룬 영화 이야기다.





불완전한 언어가 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


10여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나는 면접관들에게 다소 당돌하게 말했다. "저는 매일 밤 영화를 한 편씩 보지 않으면 잠을 못 잡니다." 약간의 과장이 섞인 말이었지만 영화를 향한 내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합격하고 몇 달 뒤, 면접에 들어오셨던 팀장님이 영화의 전당 무료 티켓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 영화 좋아하잖아. 매일 한 편씩 본다며." 그분의 무심한 듯 세심한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최근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욕심이 생겼다. 그간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영화 리뷰에 도전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반응이 별로면 슬그머니 그만두면 되니까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처음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을 다루려 했다. 물리학,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 나 같은 공학도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개봉한 지 꽤 지났고, 물리 법칙이 명확하게 작동하는 세계는 오히려 이 시리즈의 두 번째 막을 여는 주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선 Vol.1에서 데이터와 코드가 지배하는 명쾌한 세상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Vol.2에서는 그 데이터로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과, 그 간극을 메우려는 설계의 미학을 다루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2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추락의 해부>는 완벽한 텍스트다. 이 영화는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추락'이라는 사건과, 그 법칙이 무너진 자리에서 인간이 어떻게 위태롭게 진실을 '설계'해 나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중심을 잡으려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에게, 이보다 더 서늘하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없다.



물리적 추락과 불완전한 언어 사이의 심연


영화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계단을 구르는 공, 그리고 눈밭에 박힌 남자의 시체로 시작한다. 추락은 명료한 물리적 사건이다. 중력이라는 상수가 작용하고 물체는 그 법칙에 따라 바닥에 닿는다. 하지만 그 추락 직후의 일들은 더 이상 물리학의 영역이 아니다. 충돌이 끝난 직후 확신은 사라지고 해석의 영역이 열린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한 남자의 죽음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인간들의 불완전한 언어에 의해 어떻게 난도질당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카메라는 건조하다 못해 냉정하게 이 과정을 지켜본다. 마치 우리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 차가운 해부학 교실에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폭력


법정은 진실을 온전히 발견하는 곳이라기보다 제한된 증거로 판결을 내려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판결은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의 형태를 띤다. 이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은 시각 정보가 거세된 순간 찾아온다. 법정 한복판에서 부부의 싸움이 녹음된 파일이 재생될 때다. 스크린은 싸움의 장면을 끝내 보여주지 않고 건조한 문장만 남기며 관객을 오직 그들의 날 선 목소리에 가둔다.


검사는 이 파편화된 음성을 기워 붙여 아내 산드라를 냉혈한 살인마로 조립한다. 반면 변호인은 남편의 무능과 우울을 핑계로 그를 자살자로 규정한다. 소름 끼치는 점은 양측 모두 그럴듯한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이라는 거대한 퍼즐에서 고작 몇 조각을 쥐고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라 믿는 오만을 저지른다. 편집된 음성이 곧 편집된 인격이 되는 순간이다.



번역된 진실, 온도의 증발


이 해부학적 과정이 더욱 고통스러운 이유는 언어의 장벽 때문이다. 산드라는 독일인이고 남편은 프랑스인이었으며 그들은 타협의 언어인 영어를 썼다. 법정에서 산드라는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 혹은 통역가를 거쳐 한 단계 걸러진 말들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야 한다.


그녀가 영어를 쓸 때 그녀의 감정은 미묘하게 깎여 나간다. 통역을 거친 문장은 의미를 전달할 수는 있어도 온도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묻는다. 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 단 하나라도 오염되지 않은 진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는가? 산드라의 표정에서 읽히는 억울함은 살인 누명 때문만이 아니다. 나의 가장 내밀한 고통이 타인의 언어로 번역되며 왜곡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지적인 폭력 때문이다.



소년의 실험, 그리고 결단


영화의 끝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 다니엘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엄마가 아빠를 밀었는지 아빠가 스스로 뛰어내렸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리적 증거는 침묵하고 기억은 흐릿하다. 다니엘은 개에게 아스피린을 먹여 반응을 살피는 잔혹한 실험을 통해 아빠의 과거를 유추하려 한다. 그것은 과학적 진실을 찾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검증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결국 소년은 결정한다. 어떻게 죽었는가를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토대로 무엇을 믿을지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약이다. 진실이 부재한 진공 상태에서 인간이 무너지지 않고 발 딛고 서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단단한 땅,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다.



닿을 수 없는 진실의 서늘함


이 영화는 관객에게 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다니엘의 마지막 눈빛처럼 서늘한 질문을 남긴다. 당신이 보고 믿는 세상은 과연 물리적 실체인가 아니면 당신의 편의에 맞게 재구성된 서사인가.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명쾌한 결론이 아니다. 진실이 아예 없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끝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오래 흔들린다.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성숙한 태도다.


Leica CL / Summicron-C 40mm f2 / Ektachrome 100 (Monochrome Con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