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판 위에 요새를 짓다

기동전을 거부하고 구조적 완결성을 선택하다

by TAFO

나는 대한장기협회 공인 아마 2단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한국의 전통 보드게임인 장기에 대해 잠시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장기는 서양의 체스와 기원을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 네모난 칸 안에 기물을 놓는 체스와 달리 장기는 선과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기물을 놓는다. 또한 각 진영에는 왕이 머무는 제한 구역인 궁성이 존재한다.


기물의 움직임도 다르다. 체스의 비숍이 대각선으로 장애물 없이 미끄러지듯 이동한다면 장기의 상은 직선으로 한 칸 그리고 대각선으로 두 칸을 이동한다. 가장 큰 차이는 그 이동 경로 중간에 다른 기물이 있으면 길이 막힌다는 점이다. 사거리는 길지만 행마가 까다로운 기물이다.


체스와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시작 진형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 플레이어는 마와 상의 위치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왼쪽 마와 상의 자리를 바꿀 수 있고 오른쪽도 마찬가지다. 이 초기 선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오프닝 전략이 탄생한다. 우리는 이를 포진이라고 부른다. 한쪽 마를 안으로 넣고 상을 밖으로 빼면 공격적인 귀마 포진이 된다. 양쪽 마를 안으로 모아 서로 지켜주게 만들면 밸런스가 좋은 원앙마 포진이 된다. 그리고 양쪽 상을 안으로 모으면 양귀상 포진이 된다.


요즘 장기판 특히 온라인 대국은 속도전이 대세다. 열에 아홉은 귀마나 원앙마를 둔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양귀상을 차린다. 궁성의 양쪽 귀퉁이에 사거리가 긴 상을 배치하고 중앙의 졸을 모아 단단한 벽을 쌓는 이 포진은 현대 장기에서 비주류다. 초반 차림새가 느리고 굼뜨기 때문에 "차리다 죽는다"는 비아냥도 듣는다.


하지만 나에게 양귀상은 단순한 포진이 아니다. 이것은 기다림의 미학이자 완벽한 수비의 예술이다. 상대방이 칼을 갈고 창을 닦을 때 나는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판다. 그리고 그 성벽이 완성되는 순간 게임의 주도권은 속도에서 압박으로 넘어온다.


양귀상 장인으로서 겪은 수많은 패배와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곳에 정리해 본다.



1. 공격하는 길을 좁히는 기술


양귀상의 장점은 단순히 튼튼하다가 아니다. 핵심은 상대 공격 길목을 좁히는 것에 있다.


귀마나 원앙마를 상대로 할 때 상대의 침투 경로는 중앙 돌파나 양쪽 날개 돌파 그리고 농포전 등 서너 갈래로 나뉜다. 막아야 할 곳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앙으로 길게 뻗은 양쪽 상의 시선과 튼튼하게 허리를 묶은 합졸이 버티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실전적으로 한두 개의 좁은 골목으로 강제된다. 넓은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좁은 협곡으로 적을 유인해 싸우는 셈이다.


물론 단점은 명확하다. 초반의 위험이 크다. 상 두 개를 귀퉁이에 올리고 흩어진 졸을 중앙으로 모으는 공사 기간 동안 내 진영은 필연적으로 취약해진다. 즉 양귀상은 초반 20수 동안의 위태로움을 견뎌내고, 중반 이후 그 견고함 자체를 무기로 삼는 전략이다.



2. 성벽을 쌓는 순서


많은 초심자가 양귀상을 차리다 망하는 이유는 순서 때문이다. 무턱대고 상부터 올리면 탈이 난다. 성을 쌓는 데도 지켜야 할 순서가 있다.


1) 공사 시작 전에 상대가 들어올 길을 먼저 끊어야 한다. 무조건 차가 나가는 길부터 여는 게 능사가 아니다. 상대가 귀마라면 상대 진마 쪽 길을 먼저 열어 선수를 잡아야 한다. 또한 궁을 내리기 전에 면포를 먼저 안착시켜 중앙을 커버하는 것이 필수다. 만약 이 단계에서 상대가 포를 넘겨 중앙을 강제로 열려 한다면 즉시 완성된 모양을 포기해야 한다. 이때는 한쪽만 귀상을 차리는 외귀상으로 유연하게 전환하고 모양보다는 적의 침투 차단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2) 중앙의 졸을 쓸어서 합졸을 만들어야 한다. 낱개로 흩어진 졸이 모래알이라면 합쳐진 졸은 바위다. 이것은 방어벽인 동시에 나중에 상이 나갔을 때 상머리가 눌리지 않게 하는 든든한 지지대가 된다. 상대가 들어올 조짐이 보이면 상이 나가는 것보다 졸을 합쳐 방어하는 것이 먼저다.


3) 20수 전후가 되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양쪽 상이 궁성 귀에 안착하여 중앙을 노려보고 있는가. 합졸이 최소 두세 개 연결되어 상대 차가 한 번에 뚫지 못하는가. 상대 차나 포가 내 진영 깊숙이 붙었을 때 즉시 쫓아낼 수단이 있는가. 모두 OK라고 답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 이제부턴 상대가 답답함을 못 이겨 무리수를 둬야만 판이 움직인다.



3. 중반의 운영과 수 싸움


양귀상이 완성되었다면 이제 상대를 다루는 단계다.


지킨다.
양쪽 상의 긴 사거리를 이용해 상대 기물이 나오려면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게 만든다. 튼튼한 합졸을 유지하고 면포를 좌우로 흔들며 상대의 강력한 차를 외곽으로 밀어낸다.


유인한다.
일부러 한쪽 공간을 열려 보이게 둔다. 상대가 그 빈틈을 보고 덥석 들어오면 미리 계산된 수순으로 이득을 취한다.


받아친다.
상대가 공격이 막혀 답답함을 못 이기고 병을 무리하게 전진시킬 때가 있다. 그때 살아있는 상의 긴 멱을 활용해 상대의 급소를 타격하고 상대의 형태를 무너뜨린다.


양귀상은 "내가 공격한다"가 아니다. "상대가 공격하면 그 공격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는 것이 핵심이다.



4. 위기 상황과 대처법


대부분의 장기 대국은 종반 점수 싸움으로 간다. 귀마 장기는 난전 중에 상이 죽어나가지만 양귀상은 난전 억제 포진이기에 상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기물이 줄어든 종반에 길이 뚫린 상의 기동성은 차 못지않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성벽도 무너질 때가 있다. 내가 자주 겪은 위기와 대처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위기는 초반 중앙 뚫림이다. 합졸이 완성되기 전에 상대 중앙 상이나 마에게 뚫리는 경우다. 이때는 즉시 완벽한 양귀상 모양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한쪽만 귀상을 차리는 외귀상으로 전환하고 상대가 뚫은 쪽에서 기물 교환을 유도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상책이다.


두 번째 위기는 깊숙한 침투 허용이다. 포진이 반쯤 완성된 상태에서 상대 차가 내 진영 3선 심장부에 붙는 경우다. 이때 차를 억지로 쫓으려 하면 형태가 실타래처럼 꼬인다. 차라리 침투한 기물의 퇴로를 먼저 차단해 들어온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편이 낫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다.


세 번째 위기는 조급증이다. 튼튼한 요새를 짓고도 지루함을 못 이겨 먼저 무리하게 공격하다 자멸하는 경우다. 내가 먼저 나가고 싶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공격 대신 면포를 한번 띄우는 가짜 위협만 주고 다시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결론


양귀상은 화려하지 않다. 보는 맛은 덜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묵직함이 좋다. 불확실한 난전을 허용하지 않고 견고한 구조를 먼저 세운 뒤 압도적인 질량으로 밀어붙이는 승리.


장기는 속도의 게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모양의 게임이다. 나는 상대보다 빨리 달리는 대신 상대가 달릴 수 있는 길을 지워버린다.


오늘도 나는 장기판 위에 나만의 요새를 짓는다.


Fujica ST801 / Tomioka 55mm f1.4 / Double-X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