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인 정확함을 갈망했지만, 심장은 누구보다 뜨거웠던 시절
지나온 글들을 되짚어본다.
처음에는 영화 <추락의 해부>, 그리고 멘사 커뮤니티를 통해 진실과 오해의 틈새를 짚어보았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 같은 초보 작가가 갖는 생존의 의미를 기록했다. 이어 롤라이 35의 기계적 밀도, 아날로그 회로의 적분, 그리고 장기판 위의 수비 전술까지 파고들었다. 차가운 기계와 규칙 속에 숨겨진 질서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시선을 돌려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렬하게 실존하는 음악의 물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부터 이어질 세 편의 글은 각기 다른 악기가 가진 고유의 메커니즘을 다룬다. 심장을 두드리는 드럼, 화성학적 뺄셈의 미학을 보여줄 기타, 그리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의도된 길'을 찾아가는 피아노까지.
그중 오늘 이야기할 드럼만큼은 조금 다른 결로 적어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다른 악기들이 내게 탐구의 대상이나 취미였다면, 드럼은 내 20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밴드 동아리의 드러머로 활동하며, 나는 도서관보다 눅눅한 합주실 방음벽 사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스틱이 부러져라 내리치던 타격감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젊음의 발산이었고, 메트로놈의 눈금에 집착하던 시간은 기계적인 정확함을 향한 강박이자 희열이었다.
그 시절 나에게 드럼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애증의 대상이자,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번 글만큼은 현상에 대한 건조한 분석 대신, 내 기억의 속도를 따라가는 미니 자서전의 형식을 빌린다.
드럼에 처음 빠진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간 교회에서 밴드 라이브 공연을 처음 목격했다.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고, 연주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무엇보다 정말 재밌어 보였다. 하지만 당장 드럼을 배울 여건이 안 됐다. 대신 나는 오락실에서 '드럼매니아'라는 리듬 게임을 즐기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
고등학생이 되자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 엄마에게 드럼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고는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자 엄마가 통기타라도 사서 쳐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처음엔 싫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솔깃했다. 마침 반에 밴드부에서 기타 치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에게 배우며 음악에 입문했다.
하지만 드럼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나는 엄마와 딜을 했다. 비싼 등록금의 인서울 대학 대신 엄마가 원하는 지방 국립대를 가기로 한 것이다. 단, 조건이 있었다. 4년 내내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하고 밴드 동아리에서 원 없이 드럼만 치겠다는 조건이었다.
보통 밴드 동아리는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인식이 있다. 캠퍼스에 동아리가 하나뿐인 경우라면 그렇겠지만, 우리 학교에는 밴드 동아리가 무려 6개나 있었다. 학생회관 4층 복도의 한 라인이 전부 밴드 동아리 합주실이었는데, 의과대학 밴드를 제외한 나머지 5개 동아리는 모두 악기를 전혀 다루지 못하는 초보자를 신입 부원으로 뽑았다.
이유는 독특한 육성 시스템 때문이었다. 가입 후 1년은 '준비기'다. 이 기간에는 기본기 연습만 반복하고, 공연 때는 선배들의 악기를 나르는 등 온갖 수발을 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2학년이 되면 비로소 '활동기'가 되어 공연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다. 그리고 가을 정기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만 진정한 정식 멤버로 인정받아 OB가 되는 구조였다.
대가는 혹독했다. 준비기와 활동기 때는 학기 중에도 매일 저녁 3시간, 방학 때는 하루 9시간씩 의무 연습 시간을 무조건 지켜야 했다. 싫으면 탈퇴해야 했다. 사실상 과 생활이나 대외 활동을 모두 포기하고 동아리 하나에만 올인해야 하는 셈이었다. 심지어 활동기를 마치고 입대하느라 남들보다 군대를 몇 달 늦게 가야 했고, 제대 후 복학 시 학사 일정이 꼬이는 단점까지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1년 동안 연습 패드(일명 딱판)만 쳐야 해서 실용음악과 입시생 못지않은 기본기 연습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1년만 버티면 저 멋있는 드럼 세트의 독점 이용권도 확보하게 된다. 시중의 드럼 학원이나 연습실 비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극한의 가성비였다. 동아리 인맥과 경험도 보너스였다.
냉정히 인정해야 할 점은 있었다. 아무리 미친 듯이 연습한들 우리는 공부하러 대학에 온 동아리생이지, 실용음악과 전공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동아리의 교육 시스템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입문한 지 고작 1년 된 활동기 선배가 갓 들어온 신입생에게 악기를 가르쳐야 했다. 제대로 된 커리큘럼이나 교본도 없었다. 그저 수십 년간 선배의 선배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마치 구비문학 같은 올드한 교육 방식이 전부였다.
선배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 귀는 이미 높아져 있었다. 매주 교회에 끌려가며 전공자와 프로 세션들의 라이브를 듣다 보니, 동아리 내의 교육에만 의존해서는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신앙심은 없었지만 제 발로 교회 찬양팀을 찾아가 가입 신청서를 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간 게 아니라, 스승님을 만나러 간 것이다.
당시 교회 메인 드러머는 실용음악과 교수님이자,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20년 동안 수십 명의 수제자를 길러내신 전설적인 존재셨다. 그런 분께 매주 무료로 1:1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나는 종교 활동이라는 시간과 노력을 지불하고, 최고급 레슨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어내는 전략적 선택을 감행했다.
드럼신 사부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한 이후, 나는 말 그대로 드럼에 미쳐 살았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주말마다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우며 연습했다. 또한 우리 동아리의 드럼 라인을 위한 자체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구비전승으로 내려오던 주먹구구식 교육이 싫어서, 악보를 그리고 커리큘럼을 체계화해 후배들에게 배포했다. 드럼을 잘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단지 드럼이 좋아서 치는 수준을 넘어선, '잘해야 한다'는 강박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나는 원하던 대로 압도적인 아마추어 고수가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유는 충분하다. 재능은 생각보다 부족했고, 남는 게 시간뿐이던 때에는 깨달음의 부족으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으며, 한참을 돌고 돌아 길을 찾았을 땐 다시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징징거릴 생각은 없다. 중요한 건 결과값이 아니라 그 시절 나를 지탱했던 유일한 자존심의 실체다. 학점도, 스펙도,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던 불안한 20대. 내가 가진 건 오직 손바닥의 굳은살뿐이었다. 프로 씬에는 얼씬도 못 할 실력이라 해도, 그 시절 나에게 드럼은 세상과 맞서는 유일한 무기이자, 초라한 현실을 가려주는 방패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태웠다는 사실.
나에겐 드럼이 있다.
그 한 줄의 문장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나의 20대를 지탱했다.
하지만 30대가 된 지금, 드럼은 나의 거대한 레거시 코드가 되었다.
개발자의 세계에서 레거시 코드란, 더 이상 주력으로 사용하지 않아 시스템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 덮여 있는 코드를 말한다. 최신 트렌드에도 맞지 않고, 효율성도 떨어지는 낡은 명령어들의 집합.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낡은 코드를 함부로 삭제하거나 건드리면 멀쩡하게 돌아가던 전체 시스템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인생의 설계가 미숙하던 20대 시절, 시스템의 모든 핵심 로직들이 이 드럼이라는 코드를 거미줄처럼 상호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 관계, 성격, 스트레스 해소법, 심지어 아내를 만난 경로까지... 내 삶의 모든 함수가 '드럼'이라는 라이브러리를 임포트해서 짜였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이제 개발자니까 필요 없네" 하고 이 코드를 주석 처리해 버린다면? '나'라는 프로그램은 런타임 에러를 뱉으며 멈춰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 애증의 드럼, 그 드럼이 전부였던 20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이성적인 개발자의 눈으로 이 낡은 코드를 세 가지 관점에서 재해석하기로 했다.
첫째, 나는 리팩토링을 포기하기로 했다. 보통 레거시 코드는 리팩토링의 대상이다. 비효율적인 로직을 걷어내고 깔끔하게 다시 짜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내 20대의 코드를 고치지 않기로 했다. 그 시절의 무모했던 밤샘, 비합리적인 고집, 맹목적인 연습... 지금 보면 스파게티처럼 엉망진창인 코드 덩어리지만, 나는 이것을 버그가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기능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덮어두되, 가끔 열어보며 그 엉망진창이었던 열정을 사랑하기로 했다.
둘째, 이것은 성장을 위한 기술 부채였다. 학점도, 스펙도 뒤로한 채 시간을 끌어다 썼으니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빚을 내서라도 서비스를 런칭하듯, 나 역시 20대라는 불안한 서비스를 런칭하고 버텨내기 위해 드럼이라는 막대한 부채를 끌어다 쓴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태워야만 했던 그 에너지가 있었기에, 나는 무너지지 않고 지금의 안정적인 서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악성 채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투자였다.
마지막으로, 드럼은 커널 수준의 코드다. 겉보기에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차가운 개발자다. 하지만 내 OS의 가장 깊은 곳, 커널 영역에는 여전히 4비트의 펄스가 흐르고 있다. 이성적인 논리로 무장한 애플리케이션들이 위에서 돌아가고 있지만, 시스템을 부팅할 때마다 가장 먼저 로드되는 건 이 원시적인 리듬이다. 이 투박하고 뜨거운 코드가 기저에 깔려 있기에, 나는 0과 1로 이루어진 차가운 디지털 세상에서도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스틱은 잠시 내려놓았지만, 내 심장의 BPM은 여전히 그 시절의 속도로 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