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으로써 완성하는 화음의 미학
나는 화성학이 만능열쇠라고 믿었다. 악보에 적힌 Cmaj9 코드는 피아노에서나 기타에서나 똑같은 Cmaj9일 테니까 말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코드는 악기의 구조와 상관없이 동일한 소리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펜더 빈티지 62 스트라토캐스터를 잡았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아름답게 울리던 그 촘촘한 텐션 코드들을 기타 지판 위로 그대로 옮겨 보려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피아노에서 그토록 투명하게 들리던 코드가 기타에서는 진흙탕처럼 뭉개진 소리로 변했다. 물리적으로 손가락을 찢어가며 어렵게 잡았는데도 배음들이 서로 충돌해 지저분했다. 특히 앰프에 드라이브라도 걸리는 순간 저음부의 화음은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피아노와 기타는 소리를 쌓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피아노는 88개의 건반이 일렬로 넓게 펼쳐져 있어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 음을 풍성하게 쌓을 수 있는 악기다. 반면 기타는 고작 6개의 현을 가지고 있고 그마저도 튜닝 구조가 불규칙하다. 피아노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이라면 기타는 신중하게 골라 담아야 하는 좁은 그릇이다.
당황한 나는 재즈 기타 이론서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적힌 선배 연주자들의 노하우를 보는 순간 무릎을 쳤다. 음악가들이 보이싱이라 부르는 그 화음 배치 기술들은 기타라는 악기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피아노의 화려한 화성을 기타로 가져오기 위해 그들은 이미 필연적인 생략과 재배치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이 오래된 음악 이론을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피아노에서는 왼손으로 가장 낮은 음인 루트를 힘 있게 눌러준다. 하지만 기타 이론에서는 이 중요한 루트음과 5도음을 과감히 생략하라고 가르친다. 6줄을 다 튕기며 모든 구성음을 다 넣으려 하면 소리가 너무 두꺼워져서 뭉개지기 때문이다.
재즈 기타에서 말하는 셸 보이싱은 말 그대로 조개껍데기처럼 화음의 외곽선만 남기는 기술이다. 음악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하게 덜어내는 것이다.
우선 가장 낮은 음인 루트는 베이시스트가 있다면 과감히 삭제한다.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은 이미 베이스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5도음 역시 화음의 성격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생략 1순위다.
이 규칙을 적용해 남는 건 코드의 색채를 결정짓는 가이드 톤인 3도와 7도 그리고 화려한 맛을 내는 텐션뿐이다. 이렇게 핵심 알맹이만 남기니 비로소 기타 소리가 밴드 사운드를 뚫고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음악가들은 이를 세련된 보이싱이라 하지만 나는 이를 화성학적 경제성이라 부르고 싶다.
핵심음만 남겼음에도 피아노처럼 풍성한 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다. 문제는 피아노처럼 음을 촘촘하게 쌓는 클로즈 보이싱은 기타의 줄 구조상 손가락으로 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재즈 기타의 표준 기법이 바로 드롭 투다.
이론서에는 단순히 '위에서 두 번째 음을 한 옥타브 내린다'라고 적혀 있었다. 언뜻 보면 이해가 안 가지만 건반을 상상해 보면 쉽다. C, E, G, B 네 개의 음을 순서대로 쌓았을 때 위에서 두 번째인 G음을 뚝 떼어다가 가장 낮은 음으로 보내는 것이다.
피아노처럼 순서대로 쌓으면 기타 줄 간격 때문에 물리적으로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중간에 있는 음 하나를 뚝 떼어 아래로 보내면 음들의 간격이 넓어지면서 기타 지판 위에서 아주 편안한 모양으로 잡힌다.
드롭 투는 기타라는 악기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가장 효율적인 재배치 기술이었다. 빽빽하게 뭉쳐있던 음들을 널찍하게 벌려주니 연주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소리의 울림도 훨씬 시원하고 풍성해졌다.
나는 이 이론들을 실제 연주에 적용해 보았다. 가장 대표적인 코드 진행인 투 파이브 원 진행을 예로 들어보자. 악보에는 Dm9 - G13 - Cmaj9이라는 복잡한 코드가 적혀 있다.
초보 시절의 나라면 6줄 전체를 잡는 바레 코드로 낑낑대며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불필요한 루트와 5도는 버리고 오직 4번, 3번, 2번 줄만 사용해 핵심만 잡는다.
먼저 Dm9이다. 4번 줄로 단 3도인 F를 잡고 3번 줄로 단 7도인 C를 잡는다. 그리고 2번 줄에 텐션음인 9음 E를 얹는다. 단 세 줄만 울렸는데도 D 마이너 특유의 쓸쓸하고 세련된 울림이 난다.
다음은 G13이다. 놀랍게도 손가락을 거의 움직일 필요가 없다. 4번 줄의 F는 G코드의 7도음이니 그대로 둔다. 3번 줄만 C에서 반음 내려 B로 바꾸면 G코드의 3음이 된다. 2번 줄의 E도 G코드의 13음이니 그대로 둔다. 이렇게 하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서 가장 매력적인 도미넌트 사운드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Cmaj9이다. 4번 줄을 반음 내려 C코드의 3도인 E로 바꾸고, 3번 줄의 B는 C코드의 7도이니 그대로 둔다. 2번 줄을 한음 내려 D를 잡으면 C코드의 9음이 된다. C 메이저 코드의 3도와 7도 그리고 9음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세 개의 코드를 연결해 연주해 보니 손가락의 이동 반경은 1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F-C-E에서 F-B-E로, 그리고 E-B-D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불필요한 움직임을 극한으로 줄인 결과였다. 하지만 사운드는 피아노 못지않게 풍성하고 우아했다. 이것이 바로 프로 연주자들이 말하는 보이스 리딩의 묘미였다.
피아노의 원리를 기타에 적용하며 깨달은 것은 기타가 피아노보다 못한 악기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기타가 가진 6줄이라는 제약은 연주자로 하여금 무엇을 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불필요한 중복을 걷어내고 3도와 7도라는 핵심 뼈대에 가장 맛있는 텐션 하나를 얹는 그 경제성.
피아노가 더하기의 악기라면 기타는 빼기의 악기였다.
가장 본질적인 화성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리는 것. 이제 나는 기타를 칠 때 모든 줄을 울리려 하지 않는다.
필요한 음만 남기고 나머지는 손가락을 살짝 대어 소리를 막는다.
그 여백이 바로 기타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