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은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변수 가득한 세상에서 상수를 확보하는 법

by TAFO

개발자의 하루는 업데이트 알림으로 시작된다.


iOS가, 사용하던 라이브러리가, 개발 툴이 매일같이 새 버전을 내놓는다. 우리는 습관처럼 Update 버튼을 누르고 Release Note를 읽는다.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 구버전은 곧 보안 취약점이자 언젠가는 갚아야 할 기술 부채다.


그래서 우리는 강박적으로 최신을 쫓는다. 레거시가 되는 순간 도태된다는 공포. 그것이 우리를 달리는 트레드밀 위에 묶어둔다.


하지만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인생도 최신 버전이 가장 완벽할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갓 배포된 베타 버전들의 전장이다. 화려한 마케팅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반면 고전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수십억 명의 유저들에게 QA 테스트를 통과한, 가장 안정화된 버전이다.


나심 탈레브는 이를 린디 효과라 불렀다.

린디 효과 — 음식, 육체와 같이 부패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 수명이 줄어들지만, 정보, 책, 기술과 같이 부패하지 않는 것은 오래 살아남을수록 앞으로 더 오래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10년 된 책은 앞으로 10년 더 읽힐 것이고, 2000년 된 성경은 앞으로 2000년 더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은 확률적으로 증명된 생존의 법칙이다.


나는 대학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인간의 광기나 톨스토이가 고민했던 삶의 부조리 같은 것들. 내 20대는 그 낡고 두꺼운 책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개발자가 되어 온종일 뜨거운 서버와 씨름하다 보면, 문득 그때 그 소설들이 품고 있던 찹찹하고 서늘한 시베리아의 공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기술은 지수함수적으로 발전했지만, 인간의 본성이라는 OS는 수만 년 전 수렵 채취 시절에서 단 한 줄도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우리가 겪는 불안과 질투, 그리고 관계의 문제는 최신 아이폰이나 AI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버그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수백 년 전 시베리아의 설원 위에서, 혹은 고대 그리스의 광장에서 선배들이 완벽하게 디버깅 해놓은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미 해답이 적힌 공식 문서를 옆에 두고, 자꾸 엉뚱한 블로그 글을 검색하며 삽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코딩을 할 때 모든 값을 varlet 같은 변수로 선언하면 프로그램은 예측 불가능해지고 결국 망가진다. 로직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변하지 않는 지점, 즉 상수 const가 있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온통 변수다.


주가는 요동치고, 내 직장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며, 사람 마음도 수시로 변한다.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내 안에 절대 변하지 않는 상수 몇 개는 하드코딩 되어 있어야 한다.


고전은 그 상수를 제공한다. 트렌드가 변해도 훼손되지 않는 가치들. 어떠한 런타임 환경에서도 오류를 뿜지 않는 견고한 로직들. 역사책이나 철학서, 혹은 시대를 관통한 문학 작품들이 바로 그 상수다.


내가 이 브런치북을 기반으로 집필하고 있는 책 <이성적 낙관주의자> 또한 그러한 상수를 지향한다.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기보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누군가의 책장에서 낡아가며 읽히기를 바란다. 시류에 편승한 업데이트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본질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다.


개발자로서 최신 기술을 익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의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숨 가쁜 속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남들이 모두 AI와 최신 트렌드를 이야기하며 불안해할 때, 조용히 낡은 문장들을 꺼내 읽는 행위.


그것은 도태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강력한 루트 권한을 회복하는 일이다.


Contax 137 MA / Yashica ML 50mm f1.7 / Ektachrome 100 (Monochrome Conversion)


이전 04화분산 시스템의 합의 알고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