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숨은 청구서

by TAFO

오후 7시 42분.


서재의 차가운 백색 형광등 아래, 그녀의 시선은 빳빳한 황갈색 봉투 위 굵은 마커 글씨와 책상 위 휴대전화 화면을 번갈아 오가고 있었다.


화면에는 바벨이 친절하게 띄워 둔 세 줄의 추천 항목이 떠 있었다.


[ 추천 ]

1207호 관련 미결제 내역 스캔

발견된 봉투 개봉 여부 판단 보조

다음 질문 이어서 입력


봉투 개봉조차 시스템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두 번째 줄은 기묘했다. 그러나 그녀의 굳은 손가락은 먼저 첫 번째 줄을 눌렀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 봉투를 뜯어도 되는지에 대한 기계의 허락이 아니었다. 1207이라는 저 숫자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 먼저였다.


[1207호 관련 미결제 내역 스캔]


화면이 매끄럽게 전환되며 새로운 진행 막대가 나타났다.


[ 데이터 교차 분석 중 ]
고인의 금융 기록, 정기 결제 내역, 이메일 수신함을 스캔합니다.


진행 막대는 거실에서 처음 기록을 동기화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차올랐다. 단 3초 만에 막대가 사라지고, 회색 테두리의 답변 블록이 화면 중앙을 차지했다.


[ 복원 응답 ]
"내일모레가 서림 빌딩 지하 1층, '서림 셀프 스토리지' 1207호의 월 임대료 자동이체일이야. 내 계좌가 정지돼서 모레면 결제가 실패해. 약관상 미납이 발생하면 14일 뒤 폐기 절차가 시작돼. 봉투 안의 보안 카드로 결제 수단부터 당장 변경해 둬."


[ 고인 일치도 ] 94.8%
[ 상황 적합도 ] 96.2%


[ 산출 근거 ]
사망 신고에 따른 계좌 동결 상태, 카드사 정기결제 예정 내역, 서림 스토리지 서비스 이용 약관 제8조(미납 시 폐기) 적용.


그녀는 숨을 멈췄다.


1207은 상상했던 내연녀의 오피스텔 호수도, 거액을 숨겨둔 비밀 금고 번호도 아니었다. 도심 빌딩 지하의 무인 보관함 번호였다.


바벨은 그 1207호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인 자신을 속이고 왜 그것을 숨겼는지도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기계가 냉정하게 남겨 둔 것은 날짜와 요금, 미납, 그리고 '폐기 절차'뿐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휴대전화를 그대로 둔 채, 양손으로 황갈색 봉투의 입구를 꽉 잡았다. 풀칠이 단단해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겉면의 종이가 거칠게 찢어졌다. 질긴 종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를 긁고 지나갔다.


봉투 안에서 두 가지 물건이 책상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하나는 묵직한 검은색 플라스틱 마그네틱 카드였다. 카드 하단에 'Seorim Self Storage'라는 은색 로고가 작게 박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두 번 반듯하게 접힌 A4 용지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쫙 펼쳤다. 보관함 임대 계약서 사본이었다.


계약 기간은 무려 2년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고, 매월 21일 15만 원이 자동 이체된다는 항목에는 남편의 필적임이 분명한 붉은 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2년.


그녀가 전혀 몰랐던 남편의 은밀한 시간과 물건이, 저 작은 플라스틱 카드 한 장 너머의 어두운 공간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남편을 영원히 잃은 상실 때문인지, 2년 동안 철저하게 속아왔다는 배신감 때문인지 그녀 자신도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상 위 휴대전화 화면은 이미 다음 절차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 추천 ]

1207호 결제 수단 변경 신청

보관함 방문 일정 캘린더 등록

다음 질문 이어서 입력


그녀는 찢어진 봉투와 검은 카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보관함 안에 남편이 무엇을 숨겨두었는지 확인하려면, 먼저 폐기 절차부터 막아야만 했다. 바벨이 제시한 첫 번째 추천 항목을 누르고, 자신의 신용카드를 등록해야 했다. 남편이 혼자 유지해 온 비밀을 열람하기 위해, 아내인 그녀가 직접 그 비밀의 유지 비용을 떠안아야 하는 구조였다.


바벨은 남의 진실을 억지로 들이밀지 않았다. 그저 결제일이 다가온다는 객관적 사실 하나만을 앞세워, 그녀 스스로 그 비밀의 문 앞에 서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 상단의 시계는 어느새 7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례식장 서류나 정리하려던 오늘 밤의 계획은, 기계가 이끄는 대로 이미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화면 가장 위쪽에 떠 있는 [1207호 결제 수단 변경 신청] 위에서 짧게 허공을 맴돌았다.


결제 수단을 그녀의 카드로 넘겨받는 순간, 저 낯선 보관함은 남편의 비밀인 동시에 매달 그녀의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그녀 자신의 청구서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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