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특별 진술실

by TAFO

오전 9시 14분.


경기고양경찰서 별관 지하 1층 복도 끝. 회색 방음문 옆에 새 금속 명판이 붙어 있었다.


[ 바벨 특별 진술실 ]
수사 보조 시범 운영 중


형사과 강력2팀 정세린 경감은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늘 아침 강력2팀 공용 단말에 올라온 공문에는 참관 목적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교통조사계 종결 예정 사고 1건

바벨 특별 진술실 시연

강력팀 적용 확대 검토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검은 셔츠 위로 경찰청 지급 출입증을 목에 건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정 팀장님 맞으시죠? 분석지원관 김현석입니다. 들어오시면 됩니다."


방은 일반 조사실보다 좁았지만, 사방의 거대한 스크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어 보였다. 정면에는 사건 개요가 떠 있었고, 좌우에는 아직 꺼진 검은 패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천장 중앙에는 원형 스피커 세 개가 박혀 있었고, 책상 위에는 길고 검은 지향성 마이크 하나만 놓여 있었다. 의자는 단 하나. 이 방에는 오직 '질문하는 사람'의 자리만 준비되어 있었다.


정면 스크린에는 이미 사건 파일이 띄워져 있었다.


[ 사건 파일 ]
BC-0313-TR-118
고(故) 한정우, 남, 41세
사고 유형: 차량 단독 충돌
종결 단계: 최종 교차 확인 대기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한 줄 덧붙어 있었다.


[ 주의 ]
본 출력은 참고 자료이나, 공식 기록 작성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김현석이 책상 오른쪽 단말기에 손을 올렸다.


"오늘 건은 복잡한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해서 시연에 적합하죠. 차량 EDR, 블랙박스 일부, 교차로 CCTV, 신호 제어 로그, 휴대전화 로그, 응급실 채혈 기록까지 전부 들어와 있습니다. 교통조사계에서는 사실상 종결 의견인데, 마지막 교차 확인 차원에서 바벨 진술이 추가되었습니다."


정세린은 책상 위 마이크를 보았다. 검은 금속 망 아래쪽에 얇은 파란 불이 들어와 있었다. 대답할 사람은 없는데 질문 장비만 놓인 책상은 지나치게 단정했다.


"왜 하필 단순한 사고입니까?"


김현석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단순해서요.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성공 사례니까."


정세린은 더 묻지 않았다.


김현석이 조작하자 정면 벽의 사건 개요가 접히며 중앙에 대기 문구가 나타났다.


[ 바벨 특별 진술실 ]
질문을 시작하십시오.


정세린은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 차갑고 매끈한 금속 스탠드가 책상 위를 긁으며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


교통사고 파일에서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죽은 자의 회한이나 남겨진 사연이 아니었다. 충돌까지 이어진 물리적 경로와 차량 조작 여부였다. 그녀는 준비된 질문 목록의 첫 줄을 읽었다.


"사고 직전 출발지부터 충돌 시점까지의 주행 경로를 시간순으로 진술하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천장 어딘가에서 아주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악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낮고 조금 잠긴 남자의 음성. 말끝이 살짝 눌려 있었고, 문장 앞머리에서 망설이는 습관까지 옅게 묻어났다. 살아 있을 때는 평범했을 목소리가, 죽고 나서는 쉽게 의심하기 어려운 자료처럼 들렸다.


[ 복원 진술 ]
"오후 6시 49분에 자택에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남쪽 간선도로를 타고 교차로 쪽으로 이동했고, 7시 7분 사고 지점 북측 3차로에 진입했습니다. 속도는 시속 61에서 64킬로미터 사이였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좌우 벽면이 동시에 켜졌다.


왼쪽에는 차량 시동 기록 18:49, 자택 인근 방범 카메라 포착 시각, 교차로 접근 CCTV 프레임이 시간순으로 정렬되었다. 오른쪽에는 EDR 속도 곡선과 GPS 이동 경로가 떴다. 마지막 12초 구간이 확대되며 시속 63킬로미터 수치가 붉은 점으로 고정되었다.


정면 하단에 수치가 계산되어 떠올랐다.


[ 고인 일치도 ] 96.1%
[ 상황 적합도 ] 94.7%


정세린은 벽면을 훑었다. 천장에서는 고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 방의 권위는 결국 그 목소리보다도 그것을 믿게 만드는 숫자와 로그들에서 나왔다.


"여기까지는 교통조사계 초안이랑 완전히 일치합니다." 김현석이 낮게 말했다.


정세린은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충돌 직전 전방 상황과 차량 조작을 진술하십시오."


이번 대답은 더 빨랐다.


[ 복원 진술 ]
"교차로 진입 직전에 신호가 황색으로 바뀌는 걸 봤습니다. 정지선 앞에서 감속이 늦었다고 판단했고,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오른쪽으로 한 번 틀었습니다. 바로 다시 왼쪽으로 복원하려 했지만, 젖은 노면에서 차체가 밀렸습니다. 좌전면으로 중앙분리대 모서리에 충돌했습니다."


왼쪽 벽면이 즉각 바뀌었다. 교차로 신호 제어 로그, 노면 상태 보고, 사고 지점 CCTV 캡처 네 장이 차례로 떴다. 오른쪽에는 브레이크 입력률, 조향각 변화, 차체 요 레이트가 그래프로 겹쳐졌다. 마지막 2.3초 구간에서 스티어링 값이 급격히 꺾였다가 반대로 튀는 모양이 선명했다.


[ 고인 일치도 ] 95.4%
[ 상황 적합도 ] 96.8%


김현석이 손가락으로 오른쪽 벽면의 그래프 끝을 가리켰다.


"EDR이랑 CCTV 기록이 딱 맞죠? 급제동 후 급조향. 외부 충격 흔적도 없고요."


정세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세 번째 질문을 읽었다.


"타 차량 접촉, 음주, 약물, 제3자 개입 여부를 진술하십시오."


이번에는 스피커에서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 복원 진술 ]
"타 차량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운전 중 휴대전화 조작도 없었습니다. 음주 상태도 아니었고, 약물을 복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사고는 제 차량 단독 충돌이었습니다."


양쪽 벽면이 다시 정렬되었다.


왼쪽에는 충돌 부위 감정 사진, 차체 도막 대조 결과, 타차 흔적 미검출 판정이 떴다. 오른쪽에는 응급실 혈중알코올 검사 불검출, 약물 패널 해당 없음, 사고 직전 휴대전화 터치 입력 0회가 차례로 배열되었다.


정면 하단에는 이번에 신뢰구간까지 함께 표시되었다.


[ 고인 일치도 ] 97.3%
[ 상황 적합도 ] 98.1%
[ 외부 개입 가능성 ] 매우 낮음


방 안이 잠깐 고요해졌다.


질문은 더 이어질 수 있었지만, 실무적으로는 이미 충분했다. 출발 시각, 이동 경로, 속도, 신호 전환, 브레이크, 조향, 노면 상태, 충돌 부위, 타차 흔적 없음, 음주 아님, 휴대전화 조작 없음. 교통조사계가 종결 직전까지 모아 둔 자료와 바벨의 진술은 단 한 줄도 어긋나지 않았다.


정세린은 마지막 질문을 읽었다.


"사고의 직접 원인을 한 문장으로 진술하십시오."


스피커는 아주 짧게 쉰 숨을 토해 냈다.


[ 복원 진술 ]
"황색 신호 진입 직전의 늦은 감속과 급조향, 젖은 노면이 겹친 단독 사고였습니다."


그 문장은 지나치게 매끈해서, 종결 의견서의 첫 줄을 그대로 읽는 듯했다. 정면 스크린 중앙에 자동 요약이 떠올랐다.


[ 예비 판단 요약 ]

자택 출발 후 단독 주행 확인

교차로 진입 직전 감속 지연

급제동 및 급조향 후 중앙분리대 충돌

타 차량 접촉 없음 / 음주 및 약물 개입 없음

비범죄성 단독 사고 가능성 우세


[ 권고 ]
본 복원 진술과 기존 물증이 일치하므로 교통사고 종결 절차를 진행하십시오.


"이 정도면 더 볼 거 없죠?" 김현석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조사관들은 이런 사건을 제일 좋아합니다. 덧붙일 말이 없거든요."


정면 하단에 회색 버튼이 떠올랐다.


[종결 의견서 초안 생성]


김현석은 망설이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짧은 로딩 뒤, 화면 오른쪽에 표준 문안이 열렸다.


[ 종결 의견 ]
본 건은 운전자 사망에 따른 단독 교통사고로 판단됨.
제3자 개입 정황 없음.
형사 사건 전환 사유 없음.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세린은 마이크에서 손을 뗐다.


조금 전까지 이 방에는 죽은 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행정 처리에 필요한 문장들뿐이었다. 황색 신호가 들어오던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손이 떨렸는지, 아니면 담담했는지. 운전석 안에서 마지막으로 스친 감정이 공포였는지 체념이었는지.


그런 것들은 어느 패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에 질문 목록 바깥의 것이었고, 사고의 물리적 뼈대는 이미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있었다.


사고의 뼈대가 정확할수록, 살아 있던 사람의 결은 더 빠르게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났다.


김현석이 표준 문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셨죠? 오전 안에 교통조사계로 넘기면 이 건은 끝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세린의 태블릿이 짧고 강하게 진동했다.


새 사건 알림이었다.


[ 형사과 강력2팀 사건 배당 ]
사망자 1명
원인 미상 추락
장소: 스마트홈 자택
관계인 진술 상호 불일치
바벨 특별 진술실 우선 사용 요청


김현석도 자기 단말기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다음 건 들어왔네요. 강력팀 배당입니다."


정세린은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종결된 한정우의 사건은 너무 정확해서 더 파고들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그 무결한 신뢰를 만들어낸 방과 장비와 절차가, 이제 '관계인 진술이 서로 어긋나는' 미심쩍은 죽음 앞에 그대로 놓이려 하고 있었다.


복도 끝 특별 진술실 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채 반쯤 열려 있었다.


단독 사고 하나를 의심 없이 끝내게 만든 저 차가운 시스템이, 이제 사람들의 말이 엇갈리는 복잡한 사건 앞에서도 똑같은 목소리로 답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