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전 10시. 여의도 SNC 본사.
회사의 인트라넷 서버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평소라면 인사팀 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문구를 다듬고 법무팀이 수십 번을 검토했을 해고 통지서가, 바벨의 연산을 거쳐 단 0.1초 만에 생성되었다.
신사업팀 42명의 모니터 화면이 일제히 검게 변하더니, 세이지의 푸른 육각형 로고가 떠올랐다. 이어서 타운홀 강당에서 들었던 그 차갑고 단호한 구본길의 육성이, 이번에는 각자의 책상 위에 놓인 스피커를 통해 개인의 귓가로 직접 들려왔다.
[ 복원 대상 ]
고(故) 구본길 SNC 전 대표 / 데이터 코드 S-00
[ 복원 응답 ]
"신사업팀 놈들, 오늘 오전 10시부로 전부 모가지다. 억울하다느니 시간 좀 달라느니 입 아프게 떠들어봐야 소용없어. 회사 금고에 당장 현금 채워 넣으려면 이 방법이 법적으로 제일 깔끔하고 빠른 길이야. 퇴직금이랑 위로금 푼돈은 법에서 정한 대로 1원 한 푼 안 틀리고 통장에 꽂힐 거다. 다 큰 어른들끼리 감정 잡고 질척거리지 마. 내 이름 석 자 걸고, 가장 확실하게 집행한다. 지금 당장 박스에 짐 싸서 나가."
[ 고인 일치도 ] 98.5%
[ 상황 적합도 ] 99.9%
[ 산출 근거 ]
근로기준법 제24조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요건(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 충족 데이터 분석, 2008년 적자 사업부 전면 폐지 당시 당일 해고 통보 패턴, 잉여 인력 유지 비용 대비 구조조정 수익률.
사무실에는 그 어떤 비명도, 울음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과거의 구조조정은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억울하다며 책상을 엎었고, 누군가는 인사팀장의 멱살을 잡았으며, 노조는 붉은 띠를 두르고 로비를 점거한 채 꽹과리를 쳤다. 해고자들의 분노는 향할 대상이 분명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최소한의 부채감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 모니터 속에서 껌벅이는 푸른 로고를 향해 주먹을 휘두를 수도, 이미 세상에 없는 창업자의 데이터를 향해 멱살을 잡을 수도 없었다. 바벨은 법적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100%의 수치로 증명해 냈고, 사측의 절차적 정당성을 빈틈없이 코딩해 놓았다.
이것은 노골적인 폭력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만 건의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매끈한 해고였다.
* * *
오전 11시 30분. SNC 본사 10층 신사업팀.
양해린 COO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42명의 직원 중 남은 사람은 김태준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41명은 짐을 챙겨 조용히 떠나갔다.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기계가 정밀하게 계산해 준 위로금 숫자가 계좌에 꽂히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해고가 반박하기 어려울 만큼 '합리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순순히 사원증을 반납했다.
창가 쪽 구석, 텅 빈 종이 상자 앞에 선 김태준은 테이프를 끊고 있었다. 찌익, 찌이익. 날카롭게 찢어지는 테이프 소리만이 적막한 사무실의 공기를 긁어댔다.
"태준 씨."
해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불렀다. 태준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오셨습니까? 짐은 거의 다 쌌습니다. 시스템이 보안 규정 위반이라고 경고음을 울리며 보안 요원을 부르기 전에 비워줘야죠."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며칠 전 의장실에서 분노로 이글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심지어 허탈함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해린은 그 평온함이 오히려 더 견디기 어려웠다.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해린이 어렵게 입을 떼자, 태준이 테이프 커터를 내려놓고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요. 일단 쉬어야죠. 구 대표님 수첩은 집에 두고 왔습니다. 어차피 이제 세상 그 누구도, 산 사람의 글씨 따위는 믿어주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알았으니까요."
태준이 텅 빈 파티션들을 휙 둘러보았다.
"조용하죠, COO님? 옛날에 제 선배들이 구조조정 당할 땐 로비에서 삭발식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우린 참 깔끔하게 잘리네요. 바닥에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태준 씨. 저는…"
"COO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의 맑고 건조한 눈동자가 해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계를 미워할 수도 없고, 박세훈 의장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를 밀어낸 건 바벨이지만, 그 바벨에게 절대 권력을 쥐여주고 광장에서 환호한 건 저 아래층에 있는 수백 명의 내 동료들이니까요. 그 300명의 물류직 직원들이, 나를 내주고 자기 밥그릇을 지켰다고 안도하며 웃고 있는데… 제가 대체 누구의 멱살을 잡고 싸워야 합니까?"
태준의 텅 빈 목소리가 해린의 가슴을 깊게 눌렀다.
"이 끔찍한 시스템을 만든 건 인간들의 비겁함입니다. 책임지기 싫고, 내 손에 남의 피 묻히기 싫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기심이 뭉쳐서 저 바벨을 신처럼 떠받든 겁니다. 신이 내린 벌이라는데, 제가 무슨 수로 저항합니까?"
태준은 짐이 담긴 종이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잘 있으십시오. COO님도… 당신이 불러들인 그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태준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10층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해린은 멀어지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잡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치워진 빈 책상과, 모니터 위에서 차갑게 빛나는 바벨의 [퇴사 처리 완료] 로그뿐이었다.
* * *
정오. SNC 본사 12층 이사회 의장실.
박세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은장 가위로 값비싼 분재의 잔가지를 섬세하게 솎아내고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그의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위 모니터에는, 붉은색 화살표가 가파르게 솟구친 SNC의 실시간 주가 차트가 띄워져 있었다.
신사업팀 42명의 합법적이고 즉각적인 해고.
이어진 AI 물류 특허 기술의 전격 매각 공시.
이 두 가지 소식이 시장에 전해지자마자, 투자자들은 환호하며 SNC의 주식을 미친 듯이 쓸어 담았다. 경제지들은 'AI 바벨 시스템이 이끄는 투명하고 결단력 있는 혁신 경영'이라며 연일 찬사를 쏟아냈다. 노조조차 300명의 현장직을 지켜냈다는 명분 아래 입을 꾹 닫고 침묵했다.
그 누구도 피를 흘렸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 매끈하게 설계된 결과에 만족했다.
똑똑.
비서의 노크 소리와 함께 양해린이 의장실로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어, 양 COO. 마침 잘 왔어요. 방금 세이지 쪽이랑 바벨 라이선스 연장 계약 건으로 통화를 마친 참입니다."
박세훈이 가위 날에 묻은 옅은 수액을 부드러운 가죽 천으로 말끔히 닦아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가 미쳐 날뛰는 거 보입니까? 시장은 우리의 이 '투명한 기계'를 아주 사랑합니다. 리스크 제로. 나약한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완벽한 경영. 우리 SNC는 이제 바벨 없이는 단 하루도 굴러갈 수 없는 완벽한 몸이 됐어요."
해린은 박세훈의 환희에 찬 얼굴을 보며,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권력자는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기계에게 넘긴 채 이토록 홀가분해 보였다.
"의장님."
해린이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기계에게 도덕을 외주 준 회사의 끝이 어떨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박세훈의 입가에 맴돌던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는 섬세하게 움직이던 가위를 크리스털 트레이 위에 차갑게 소리 내어 내려놓고는, 서늘하고 권태로운 눈으로 해린을 응시했다.
"끝? 양 COO, 기업의 끝은 파산뿐이지, 도덕적 타락 따위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저 위대한 기계 덕분에 그 파산의 늪에서 벗어났고요."
박세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양 COO. 세상은 원래 거대한 톱니바퀴입니다. 누군가는 밀려나야 기계가 돌아가죠. 바벨은 그저 누가 밀려나야 가장 효율적인지를 아주 과학적으로 골라줄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 과정이 '합리적'이라는 핑계만 대주면, 기꺼이 두 귀를 막고 평온하게 잠이 듭니다. 그게 이 세상이 잘 굴러가는 작동 원리예요."
해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박세훈이 묘사한 그 끔찍한 세계관은 이미 SNC라는 회사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회사는 역대급 영업이익을 갱신하며 부활할 것이고, 짐을 싸서 떠난 42명의 이름은 그 누구의 입에서도 1초 이상 오르내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진심과 기억을 밀어내며 완성된 기계의 시대.
양해린은 자신이 열어젖힌 이 디스토피아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채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