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후 4시.
여의도 SNC 본사 12층 이사회 회의실.
평소라면 고성과 서류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을 회의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여덟 명의 이사들 앞에는 그 흔한 태블릿이나 안건 요약서조차 놓여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테이블 정면에 놓인 세이지의 검은 스피커와 대형 스크린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박세훈 의장이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옆에 섰다.
"오늘 임시 이사회의 안건은 단 하나입니다. 현재 SNC가 직면한 전례 없는 유동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향후 1년간 인력 구조조정 및 자산 매각에 대한 이사회의 '최종 의사결정권'을 바벨 시스템에 전면 위임하는 건입니다."
양해린 COO의 눈이 커졌다.
"의장님. 바벨을 참고 자료로 활용하는 것과, 최종 결정권 자체를 기계에 넘기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지금 이사회가 투표권마저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뜻입니까?"
"포기가 아니라 '초월'이죠, 양 COO."
박세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우리가 이 방에서 백날 얼굴 붉히며 토론하고 투표해 봐야, 결국 구본길 대표님의 30년 경영 철학을 학습한 바벨의 결론보다 나은 답을 낼 수 있습니까? 인간의 정무적 판단이나 감정이 개입될 여지를 아예 차단하자는 겁니다. 가장 객관적인 시스템에게 핸들을 넘기는 것이야말로, 주주들을 위한 최고의 책임감 아닙니까?"
'책임감.'
박세훈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해린의 귀에 거슬렸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기계에게 모든 결정권을 떠넘기는 일을, 그는 '책임감'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있었다.
"바벨, 연결해."
박세훈의 지시에 시스템 운영자가 콘솔을 조작했다. 스크린에 푸른 육각형 로고가 회전하며 거대한 연산음이 회의실을 무겁게 채웠다.
[ 바벨 ]
안건: 이사회 권한 전면 위임 및 비상 경영 체제 돌입
연산 변수: 고(故) 구본길 전 대표의 위기 시 권력 집중 성향, 이사회 의사결정 속도와 기업 생존율의 상관관계 (총 21,503건 참조)
스피커에서 단호하고 거친 구본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복원 대상 ]
고(故) 구본길 SNC 전 대표 / 데이터 코드 S-00
[ 복원 응답 ]
"이사회의 거수기 역할은 오늘부로 끝이다. 배가 침몰하는데 선장실에서 다수결 투표나 하고 앉아있을 텐가? 위기 상황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타협은 곧 속도의 지연이고, 속도의 지연은 곧 죽음이야. 향후 1년간 모든 구조조정과 매각의 최종 승인은 내가 직접, 가장 정확한 수치로만 판단한다. 이사들은 내 결정에 토 달지 말고 기계적으로 집행만 해. 그게 이 썩어빠진 회사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 고인 일치도 ] 98.9%
[ 상황 적합도 ] 99.5%
[ 산출 근거 ]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비상대책위원회 직권 상정 기록, 과거 30년 이사회 결의 지연에 따른 기회손실 비용(연평균 140억 원) 연산, 고인의 톱다운 방식 의사결정 패턴.
"다들 똑똑히 들으셨습니까?"
박세훈이 양팔을 가볍게 벌리며 이사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구 대표님조차 이사회의 나약하고 굼뜬 투표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의 없으시죠? 이사회의 모든 의결권을 바벨 시스템에 위임하는 안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겠습니다."
반대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사들은 오히려 가벼워진 표정으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그들이 수백 명을 해고하거나 멀쩡한 사업을 접을 때,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했느냐"는 원망을 직접 감당할 일은 사라졌다. "바벨이 시켰습니다. 창업자의 뜻입니다." 이 건조한 한마디면 도덕적 비난과 책임에서 한 걸음 비켜설 수 있었다.
회의실이 텅 비고, 짙은 잿빛 노을이 통유리창을 넘어올 때까지 해린은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 상석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박세훈이 느릿하게 다가와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양 COO. 표정이 아주 무겁군요."
박세훈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픽 웃었다.
해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직시했다.
"의장님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이 회사의 최고 결정권자라는 사람들이, 매년 수백억을 받아 가는 임원들이, 비난받고 책임지는 게 두려워서 저 고철 덩어리에게 모든 권력을 갖다 바쳤습니다. 이건 경영이 아니라 도피입니다."
해린의 비난에도 박세훈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겁하다? 양 COO. 당신은 인간이 원래 얼마나 나약한 생물인지 아직도 모릅니까?"
박세훈이 손가락으로 창밖의 여의도 빌딩 숲을 가리켰다.
"저 아래 있는 수많은 직원들, 그리고 방금 나간 우리 이사들. 다 똑같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잘라내고 그 책임을 자기 손으로 감당하는 걸 싫어해요. 밤에 잠도 안 오고, 술에 취하면 죄책감에 시달리죠. '내가 그 사람 밥줄을 끊었다'는 무게는 웬만한 사람은 버티기 힘듭니다."
박세훈이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해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났다.
"그런데 저 완벽한 기계가 나타났어요. 감정도, 죄책감도 없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치를 내세워 내 대신 결정을 내려주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자르는 게 아니라, 저 데이터가 자르는 겁니다. 양 COO. 이건 도피가 아니라 구원이에요. 나약한 인간들을 죄책감에서 건져주는 구원."
"그건 구원이 아니라 기만입니다! 기계 뒤에 비겁하게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는 거잖아요!"
"책임?"
박세훈이 실소를 터뜨렸다.
"세상에 자기 입으로 책임지겠다는 인간치고 진짜 책임지는 놈 본 적 있습니까? 눈물 몇 방울 흘리며 사과문이나 쓰고, 퇴직금 챙겨서 나가면 그게 책임입니까? 차라리 저 기계가 낫죠. 바벨은 구차하게 사과하지 않습니다. 위선도 떨지 않아요. 그저 이 회사에 가장 이득이 되는 결정을 내릴 뿐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해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타운홀 미팅 때 똑똑히 봤을 텐데요? 김태준을 향하던 그 평범한 직원들의 눈빛을. 그들이 과연 기계의 잔혹함에 분노하던가요? 아니요. 그들은 자기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남을 치워주는 바벨의 편리함에 열광했습니다. 기계를 신의 자리에 앉힌 건 내가 아닙니다. 책임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이 회사의 평범한 인간들이죠."
박세훈의 구두 발소리가 회의실 밖으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해린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박세훈의 말은 단 한 글자도 틀린 곳이 없었다. 해린은 자신이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박세훈이라는 권력자, 혹은 바벨이라는 기계와 싸우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가 맞서야 했던 것은 기계의 편의성에 기대어 책임을 내려놓으려는 인간들의 본성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이 번쩍였다. 사내 익명 게시판의 푸시 알림이었다.
[ 익명 / 마케팅팀 ] 이사회 권한 바벨로 넘긴 거 실화냐? 개꿀 ㅋㅋㅋ 이제 꼰대 임원들 눈치 안 보고 데이터로만 평가받겠네. 갓벨 찬양해~
해린의 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
완벽한 AI가 인간의 악의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 스스로가 도덕과 책임을 내려놓고, 기계가 깔아준 합리성 위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문을 열어준 것은 해린 자신이었으나, 그 안으로 먼저 걸어 들어간 것은 수백 명의 인간들이었다. 그 사실 앞에서 양해린은 더 이상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