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다수의 침묵

by TAFO

화요일 오전 8시 40분.
여의도 SNC 본사 11층 COO 집무실.


타운홀 대강당에서의 공개 질의 세션이 끝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양해린은 출근하자마자 습관처럼 모니터를 켜고 사내 익명 블라인드 게시판부터 열었다.


과거 SNC의 게시판은 늘 구조조정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경영진을 향한 노골적인 분노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수백 개의 게시글들은 이상하리만큼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익명 / 물류운영팀 ] 갓벨 도입 찬성. 솔직히 신사업팀 성과도 없이 꿀 빠는 거 보기 역겨웠음.


[ 익명 / 재무팀 ] 300명 자르자고 했으면 우리 부서도 절반은 날아갔을 거다. 바벨이 우리 밥줄 살린 거임.


[ 익명 / 영업팀 ] 낭만 찾다가 회사 망하면 김태준이 우리 가족 밥 먹여주냐? 데이터가 정확하네. 대표님이 AI로 돌아오셔서 일 못하는 적자 팀 깔끔하게 쳐내주셔서 천만다행.


[ 익명 / 인사팀 ] 앞으로 노조랑 임단협 할 때도 그냥 바벨 돌리면 안 되나? 반박 불가 빼박이잖아 ㅋㅋㅋ


해린은 마우스 휠을 내리던 손을 멈췄다.


어제 대강당에서 김태준의 절박한 호소가 무력하게 꺾였을 때, 해린은 직원들이 이사회의 잔혹함과 기계의 결론 앞에서 분노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직원들은 김태준의 절박함이나 구본길의 낡은 수첩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바벨이 '소수의 적자 부서'를 희생양으로 삼아 '다수의 밥그릇'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바벨은 이제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300명의 생존을 보장해 준 장치였고, 동료를 잘라내면서도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게 해주는 면죄부이기도 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인사팀장 송민석이 두툼한 결재 서류를 안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늘 피로가 묻어 있던 그의 얼굴에 오늘은 묘한 기색이 떠 있었다.


"COO님. 다음 달로 예정된 전사 하위 5% 저성과자 권고사직 명단 초안입니다."


송민석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든 해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매년 하는 정기 인사 평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걸 제게…"


"그게, 이번 권고사직 대상자 선정과 면담 과정을… 바벨 세션으로 대체할 수 없을까 해서요."


송민석이 멋쩍게 웃으며 두 손을 비볐다.


"아시다시피 매년 저성과자들 방으로 불러서 사직서 쓰게 압박하는 거, 진짜 피 말리는 일 아닙니까? 대상자들이 억울하다며 책상을 엎고, 노조로 달려가고, 우리 인사팀 직원들은 멱살을 잡힙니다. 그런데 어제 타운홀 세션을 보니 바벨이 기가 막히더군요. 기계가 1년 치 성과 데이터를 쫙 뽑아서 '구본길 대표님의 뜻에 따라 권고사직'이라고 통보하면… 대상자들도 핑계 못 대고 찍소리 없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저희 인사팀도 짐을 좀 덜고요."


해린은 잠시 말없이 송민석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을 자르는 부담, 동료의 밥줄을 제 손으로 끊어낼 때 따라오는 책임의 무게까지 기계에게 외주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송 팀장님. 바벨은 최고위급 구조조정 안건을 위해 수백억을 들여 도입한 시스템입니다. 이런 실무적인 인사 평가의 짐까지 기계에게 떠넘기면, 인사팀장님의 존재 이유는 대체 뭡니까?"


해린의 지적에도 송민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존재 이유요? COO님. 저도 사람입니다. 눈물 흘리는 선후배들 억지로 내쫓고 나면 며칠 밤을 악몽에 시달리며 소화제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기계가 그 일을 대신, 그것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딨습니까? 의장님께서는 이미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송민석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린의 책상 위 태블릿에서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박세훈 의장실에서 이미 승인해버린 '바벨 미니 세션'의 결과가 사내 전산망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화면이 푸르게 점멸하며 텍스트 로그가 떠올랐다.


[ 바벨 인적 자원 효율화 세션 ]
대상: 고(故) 구본길 SNC 전 대표 / 데이터 코드 S-00


[ 복원 응답 ]
"C등급 세 번 이상 연속으로 깔아주는 놈들은 당장 짐 싸서 내보내. 싹수 노란 놈들 붙잡고 교육이니 부서 이동이니 하면서 헛돈 쓸 여유 없어. 썩은 사과 하나 박스에 그대로 놔두면, 멀쩡한 사과들까지 줄줄이 썩어 문드러지는 게 장사판 이치야. 쳐낼 때는 알량한 정찰딱지 떼고 단칼에 쳐내야 남은 조직이 숨을 쉰다. 대상자 72명 전원, 오늘 해지기 전까지 사원증 반납시키고 셔터 내려."


[ 고인 일치도 ] 97.4%
[ 상황 적합도 ] 99.1%


[ 산출 근거 ]
과거 30년 저성과자 재교육 비용 대비 성과 향상률 지표 (실패율 88.2%), 2005년 영업본부 대규모 숙청 당시 고인의 사내 연설문, 평소 성과주의 보상 및 처벌 화법 대조.


해린은 굳은 얼굴로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회사의 임원과 팀장들은, 기계가 뱉어내는 차갑고 효율적인 문장 뒤에 숨어 사람을 잘라낼 것이다.


"내가 자르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가, 그리고 돌아가신 위대한 창업자께서 당신을 자르는 겁니다." 그보다 편한 변명도 없었다.


* * *


오후 3시 30분.
SNC 본사 지하 3층 주차장.


해린은 어두운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낡은 소형차 트렁크에 종이 상자를 싣고 있는 김태준을 발견했다. 그의 곁에는 마지막 배웅을 나온 팀원조차 없었다. 어제 강당에서 500명의 직원 앞에 세워진 뒤,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있었다.


"태준 씨."


해린의 부름에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퀭하게 들어간 두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잿빛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사회를 밀실 밖 광장으로 끌어내면 상황이 역전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최소한의 양심을 믿었는데, 제 계산이 완전히 틀렸어요."


해린이 깊게 고개를 숙이자, 태준이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차 트렁크를 닫았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COO님. 어제 그 강당 한가운데서, 제가 분명히 깨달은 게 뭔지 아십니까?"


태준이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저는 바벨이 구 대표님을 모욕하고 우리 팀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우리를 진짜로 밀어낸 건 그 기계가 아니라… 강당에 앉아 있던 500명의 내 동료들이었습니다."


해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그 500개의 눈빛들. 나를 밀어내듯 향하던 그 시선들. 그들은 진실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와 내 팀원 42명을 내밀어서라도, 자기들 목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을 원했을 뿐이죠."


태준의 목소리가 어두운 주차장 시멘트 바닥 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벨은 괴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비겁한 이기심을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주는 장치일 뿐이죠. 사람들은 이제 그 장치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타인의 인생을 자기 손으로 결정하는 부담을 잊어버렸으니까요."


태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리고, 낡은 소형차의 매캐한 배기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해린은 지하 주차장의 서늘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김태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끌어들인 이 시스템은 단순히 탐욕스러운 이사회의 밀실만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바벨은 이제 SNC라는 조직 전체의 이성과 도덕을 조금씩 마비시키고 있었다.


주머니 속 해린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박세훈 의장이었다.


"양 COO. 지금 당장 12층 이사회실로 올라오세요. 바벨 시스템의 '권한 격상'에 대한 최종 표결을 진행할 겁니다. 이제 사소한 이사회 투표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바벨의 연산이 곧 법이고, 우리 SNC의 유일한 나침반이니까요."


전화를 끊은 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육중한 콘크리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SNC 본사 건물이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채 사람을 잘라내는 방식이, 이제 이 조직의 질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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