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완벽한 도살자

by TAFO

월요일 오후 2시 25분. 여의도 SNC 본사 2층 대강당.


마이크를 쥔 김태준의 거친 숨소리만이 500명이 들어찬 거대한 공간을 맴돌고 있었다. 단상 위 대형 스크린에서는 세이지의 바벨 시스템이 내뿜는 푸른빛이 일렁였다. 기계가 인간의 얄팍한 딜레마를 비웃듯 첫 문장을 내리꽂은 직후, 강당의 공기는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해린은 객석 맨 앞줄에서 두 손을 꽉 쥔 채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바벨, 계속해. 네가 얼마나 차갑게 움직이는 시스템인지 이 500명 앞에서 마저 증명해 줘.'


[ 복원 응답 ]

"네가 그토록 감싸고도는 신사업팀 마흔두 명의 배부른 낭만 챙겨주자고, 당장 2년 동안 이 회사 금고에서 현금 214억을 허공에 태워야 해. 그 돈 당장 어디서 끌어올 건데? 내 30년 장사치 짬밥이랑 지금 우리 회사 장부를 싹 다 털어보니, 그 미친 돈을 메꿀 방법은 딱 하나뿐이더군. 밑바닥에서 짐 나르는 현장 물류직 300명, 오늘 당장 모가지 치는 거."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갈라졌다. 통로에 서서 생중계를 지켜보던 현장직 직원들의 어깨가 일제히 굳어졌다. 바벨의 서늘한 목소리는 끊김 없이 이어졌다.


[ 복원 응답 ]
"네가 그렇게 핏대 세우며 찾는 그 잘난 '사람'에, 현장직 300명 밥줄은 왜 쏙 빠져 있어? 싹수도 안 보이는 너희 넥타이 부대들 미래 챙기자고, 당장 오늘내일 처자식 입에 풀칠해야 하는 300가구 밥그릇을 발로 차버려? 그게 네놈이 말하는 그 알량한 '다음 10년'이야? 내 30년 장사 인생에 그딴 역겨운 샌님 짓거리, 이기적인 위선은 단 한 번도 용납한 적 없어. 신사업팀 셔터 내리는 건 너희 42명을 매정하게 버리는 게 아니야. 당장 오늘내일 피 말리는 300명을 살려내기 위한, 가장 피눈물 나고 확실한 계산표다."


[ 고인 일치도 ] 96.7%
[ 상황 적합도 ] 98.1%


[ 산출 근거 ]
2011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R&D 부서 축소 및 현장직 고용 유지 결재안, SNC 현재 현금흐름표, 부서별 인건비 대비 단기 유동성 기여도 연산, 고인의 구조조정 우선순위 원칙 대조.


스크린에 뜬 명확한 텍스트와, 스피커를 때리는 단호한 창업자의 육성.


기계는 윤리적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댄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인간이 감히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워하는 가장 잔인한 '기회비용의 청구서'를 정확한 수학으로 뽑아냈을 뿐이었다.


신사업팀 42명의 불확실한 미래 vs 현장직 300명의 절박한 오늘.


강당에는 적막이 흘렀다.


마이크를 쥐고 있던 김태준의 두 손에서 스르르 핏기가 가셨다. 그는 마른입을 꽉 깨물었지만, 단 한 마디의 반론도 내뱉지 못했다.


그는 그저 회사의 미래와 동료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저 완벽한 AI는 단 10초의 연산만으로, 그를 '자신의 부서를 살리기 위해 300명의 현장직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려던 위선자'로 몰아넣어 버렸다.


"그건… 그런 뜻이…"


태준이 마이크를 향해 가까스로 입을 뗐지만, 기계의 완벽한 셈법 앞에서 인간의 구차한 항변은 이미 힘을 잃고 허공에서 바스러져 내렸다.


해린은 충격에 휩싸인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객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계획은, 기계가 태준의 진심을 가차 없이 꺾는 모습을 보여주어 전 직원의 공분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응당 저 차가운 시스템에 분노하고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객석에서 목격한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날이 선 '적의'였다.


통로를 메우고 있던 물류운영팀, 고객지원팀, 영업팀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대 위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김태준을 향하고 있었다.


'감히 너희 42명 살리자고 우리 300명 모가지를 치려 했어?' 생존 본능이 빚어낸 맹렬한 적대감이었다.


"참 나… 지들 살겠다고 우리를 쳐내라는 거였네."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내뱉은 혐오 섞인 냉소가 강당의 고요를 찢었다. 그 한마디는 빠르게 번져나갔다. 여기저기서 날 선 웅성거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지들 밥그릇 챙기려고 죽은 대표님 낡은 수첩까지 들고나와서 감성팔이 한 거잖아."


"바벨 아니었으면 우리 부서가 저 엘리트 새끼들 똥 치우느라 단체로 날아갔을 거 아냐."


"데이터가 정확하네. 구 대표님이 꿰뚫어 보신 거지."


해린은 숨이 턱 막혔다.


이것이 군중의 민낯이었다.


사람들은 진실이나 낭만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 몫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수만 있다면, 그게 차가운 기계라도 기꺼이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벨은 비인간적인 잔혹한 기계가 아니었다. 다수의 밥그릇을 지켜준 새로운 구원자였다.


객석 맨 앞줄, 박세훈 의장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광장을 완벽하게 장악한 승리자의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양 COO. 방금 전까지 당신 표정에 묘한 기대감이 가득하길래, 속으로 무슨 엉뚱하고 위험한 꿍꿍이를 품고 있나 짐작은 했습니다만."


해린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박세훈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사람의 바닥을 너무 모릅니다."


박세훈이 가볍게 턱을 괴며 낮게 속삭였다.


"대중은 진실 따위엔 관심 없습니다. 그저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타인을 밀어내서 내 생존을 보장해 줄 완벽한 '면죄부'를 원할 뿐이죠. 보십시오. 저들이 지금 자신들의 생존을 수치로 증명한 저 시스템을 비난합니까? 아니요. 저들은 지금 바벨이라는 새로운 신에게 기꺼이 무릎을 꿇고 환호하고 있는 겁니다."


박세훈의 말대로였다.


무대 위, 철저하게 고립된 김태준은 500명의 싸늘한 적의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손에서 마이크를 툭 놓아버렸다.


'삐익-' 하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마이크 하울링 소리가 대강당을 비명처럼 울렸다.


태준은 텅 빈 눈으로 허공에 떠 있는 바벨의 차가운 로고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진심을 호소하기 위해 해린이 깔아주었던 딜레마의 무대는, 역설적으로 기계의 완벽함과 대중의 이기심을 증명하는 잔인한 무대가 되어버렸다.


바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태준을 무너뜨렸고, 다수의 군중은 그 장면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해린은 자신이 끌어들인 이 시스템이 이사회의 밀실을 넘어, 마침내 회사 전체의 이성과 양심마저 잠식했음을 깨달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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