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딜레마의 제단

by TAFO

금요일 오전 10시.
여의도 SNC 본사 12층 이사회 회의실.


신사업팀 강제 해체 통보가 내려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양해린 COO는 평소처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박세훈 의장과 독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 위에는 사내 익명 게시판의 동향을 빼곡히 요약한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김태준 팀장이 죽은 구본길 대표의 수첩 나부랭이를 들고 직원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모양이더군요."


박세훈이 에스프레소 잔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는 나른하고 평온했지만, 잔 너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죽은 창업자의 뜻을 이사회가 기계 뒤에 숨어 조작했다느니, 구조조정의 다음 타깃은 너희 부서가 될 거라느니. 쥐새끼처럼 사내 여론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양 COO. 애초에 이 회사에 바벨을 들이자고 한 건 당신입니다. 이 불쾌한 소음, 어떻게 잠재울 생각입니까? 깔끔하게 징계위원회 열어서 모가지 날려버릴까요?"


해린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은밀한 밀실에서 김태준 하나를 잘라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박세훈과 이사회는 영원히 저 기계의 장막 뒤에 숨어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그들을 밀실 밖, 공개된 자리로 끌어내야만 했다.


"단독 징계위원회는 오히려 김 팀장을 순교자로 만들어 줄 뿐입니다, 의장님."


해린이 꼿꼿한 자세로 박세훈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이사회가 무언가 구린 구석을 숨기고 있다는 직원들의 의혹만 눈덩이처럼 키우겠죠. 가장 확실하게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전 직원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앞에서 바벨의 무결성을 증명해 내는 겁니다."


박세훈의 한쪽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비스듬히 치켜올라갔다.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네. 다음 주 월요일, 본사 대강당에서 '타운홀 바벨 세션'을 여는 겁니다. 김태준 팀장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전 직원이 지켜보는 한가운데서 그가 직접 바벨에게 공개 질의를 던지게 판을 깔아주는 겁니다. 그가 내세우는 감성과 종이 수첩의 낡은 기록이, 바벨의 거대하고 완벽한 연산 앞에서 얼마나 힘을 쓰지 못하는지 모두가 목도하게 만드는 겁니다."


해린의 제안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녀의 진짜 목적은 바벨의 무결성을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수백 명의 직원 앞에서 바벨이 김태준의 진심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고 차가운 민낯을 드러낼 때, 직원들이 그 비인간적인 잔혹함에 경악하여 이사회와 시스템 자체에 반기를 들게 만들려는 치밀한 함정이었다. 아무리 돈에 매인 사람이라도 저 차가운 시스템에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는, 해린의 간절한 믿음이 깔린 도발이었다.


박세훈은 한참 동안 해린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내 그의 입가에 깊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훌륭하군요. 반란군의 목을 베어 광장 한복판에 효수하자는 뜻이군요. 기계의 완벽함을 전 직원에게 뼛속 깊이 각인시킬 가장 확실한 쇼가 되겠습니다. 진행하세요."


권력자는 기계의 완벽한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린은 군중의 일말의 양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동상이몽의 공기 속에서, 거대한 딜레마의 무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 * *


월요일 오후 2시.
SNC 본사 2층 대강당.


500석 규모의 강당은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직원들은 통로까지 메우고 섰으며,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전 세계 지사로 실시간 생중계되고 있었다. 강당의 공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단상 중앙에는 거대한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마이크 한 대만이 외롭게 놓여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이 켜졌다. 깊은 검은 배경 위로, 바벨 시스템의 푸른 육각형 로고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서버의 연산음이 강당의 대형 스피커를 타고 낮게 웅웅거렸다. 인간을 심판할 무언가를 불러내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 바벨 ]
타운홀 공개 세션 활성화


강당 맨 앞줄, 푹신한 VIP 석에 자리 잡은 박세훈과 임원들은 마치 오페라 1막을 관람하듯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들 옆에 선 양해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무대 위로 오르는 한 남자를 지켜보았다.


김태준이었다.


그는 며칠 사이 십 년은 늙어버린 듯 초췌했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해린이 억지로 마련해 준 이 잔혹한 무대가, 자신과 팀원들의 명예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무대임을 알고 있었다. 기계를 논리적 딜레마 앞에 세워, 인간의 가치를 수치로만 환산하는 저 알고리즘의 맹점을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했다.


마이크 앞에 선 태준은 무겁게 침묵을 삼켰다. 500명의 숨죽인 시선이 일제히 그의 굳게 다문 입술로 쏟아졌다.


"구본길 대표님."


태준의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강당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스크린의 푸른 로고가 그의 음성에 반응하며 미세하게 파동 쳤다.


"대표님은 30년간 냉혹하게 회사를 이끄셨습니다. 장부의 숫자가 안 맞으면 가차 없이 베어냈죠. 맞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회사는 숫자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태준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구본길의 낡은 가죽 수첩을 꺼내 허공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는 닳으면 버리는 기계 부품이 아니라, 피가 도는 사람입니다. 당장의 1, 2년 적자가 두려워 미래의 기둥이 될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친다면, 이 회사에 과연 '다음'이라는 게 존재하겠습니까. 대표님이 쓰러지시기 직전에 제 손을 잡고 하셨던 말씀, 그리고 이 수첩에 친필로 남기신 진심. '당장 수익이 안 나도 안고 간다.' 그게 피도 눈물도 없던 인간 구본길이 죽음 앞에서 깨달은 진짜 철학 아닙니까?"


태준이 마이크를 쥔 손에 핏대가 서도록 힘을 주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짓씹듯 말했다.


"묻겠습니다, 바벨. 당장의 장부상 적자 몇 푼을 지우기 위해 미래의 가치와 사람의 목숨줄을 내다 버리는 것이, 당신이 연산해 낸 SNC의 진짜 정신입니까?"


태준의 억눌린 일갈은 단순한 항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기계를 향해 던지는, 살아있는 인간의 가장 무겁고 절박한 호소였다.


효율이냐, 인간성이냐. 강당에 모인 500명의 직원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누군가는 태준의 처절하게 억눌린 울분에 동화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쥐었고, 누군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해린은 두 손을 꽉 모아 쥔 채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제발 저 오만한 기계의 모순을 보여줘. 대답하지 못하고 멈춰버려.'


[실시간 질의 입력 완료]
[비정형 감성 데이터 및 미래 가치 환산 모델 연산 중…]


스크린 하단으로 수만 줄의 데이터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강당을 채우는 연산음이 점점 거칠고 날카로운 파열음으로 변해갔다.


바벨은 태준이 던진 '미래의 가치'와 '사람의 소중함'이라는 윤리적 딜레마를 마주하고, 구본길의 30년 치 삶 전체를 수천 번 분해하고 재조립하며 답을 찾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10초. 20초.


여유롭던 박세훈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기계가 대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해린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기계가 인간의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드디어 논리적 오류를 일으킨 것일까? 인간의 진심이 그 차가운 통계의 벽을 허문 것일까?


마침내, 거칠게 요동치던 파형이 스크린 중앙에서 서늘한 일직선으로 모이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연산이 끝났다.


[ 복원 대상 ]

고(故) 구본길 SNC 전 대표 / 데이터 코드 S-00

스피커에서 무겁고, 끝을 무 자르듯 잘라내는 차가운 구본길의 육성이 강당 전체를 짓누르듯 쏟아져 내렸다.


[ 복원 응답 ]

"김태준. 애초에 질문부터가 틀려먹었어. 넌 지금 당장 돈도 안 되는 그놈의 '미래' 타령을 볼모로 잡고, 아주 비싼 밥 먹으며 배부른 위선을 떨고 있는 거다."


태준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강당의 온도마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해린이 기대했던 기계의 오류나 인간적인 망설임 따위는 단 한 톨도 묻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바벨은 인간이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가장 가혹한 청구서를 내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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