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산 자의 기억, 죽은 자의 데이터

by TAFO

목요일 오후 2시.


여의도 SNC 본사 12층 이사회 의장실. 최고급 가죽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은 박세훈 의장은 여유롭게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양해린 COO의 무릎 위에는 신사업팀 해체에 따른 특허 매각 리스트가 놓여 있었다. 방 안을 떠돌던 클래식 선율은,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비서의 만류를 뿌리치고 들어온 김태준은 초췌했다. 며칠 밤을 새운 듯 눈가엔 짙은 그늘이 져 있었고, 넥타이는 비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만큼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무겁고 집요했다.


"김 팀장.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짐 안 싸고."


박세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태준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낡고 손때 묻은 검은색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단호하게 내려놓았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첩이 펼쳐졌다.


"제 기억을 못 믿으시겠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구본길 대표님이 생전에 매일같이 직접 쓰시던 업무 수첩입니다. 쓰러지시기 직전, 10월 12일 자 메모를 보십시오."


박세훈은 눈썹을 까딱하며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만년필 잉크가 번진 페이지 위에는, 구본길 특유의 필압이 강하게 실린 흘림체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5. 10. 12. 태준이 면담. 당장 수익 안 나도 신사업 안고 간다. 기둥이 될 놈들. 다음 10년.


태준이 꽉 다문 턱에 힘을 주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보셨습니까? 제 기억이 조작된 게 아닙니다. 대표님은 분명히, 자기 손으로 직접 저렇게 적어두셨습니다. 기계가 뭐라 떠들든, 저게 살아있는 창업자의 진짜 숨결이고 흔들림 없는 유지입니다."


그는 이 분명한 물증 앞에서는 저 권력자도, 기계도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박세훈의 입가에 번진 것은 당혹감이 아니었다. 연민을 가장한 서늘한 비웃음이었다. 박세훈이 수첩을 손가락 끝으로 툭 밀어내며 양해린을 쳐다보았다.


"양 COO. 바벨에 저 내용도 입력되어 있습니까?" 해린이 무거운 얼굴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수기 메모 스캔본 전체가 이미 1차 데이터베이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벨은 이 문장의 존재를 알고 연산했습니다."


"그런데도 기각을 했다? 이유가 궁금하군요. 한번 들어봅시다."


해린은 태준의 굳은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태블릿을 조작해 미니 세션을 가동했다. 바벨의 푸른 육각형 로고가 의장실의 벽면 스크린에 떴다.


[ 바벨 비정형 데이터 검증 ]
대상: 2025년 10월 12일 자 구본길 전 대표 수기 메모

질의: 해당 메모를 경영 철학의 우선순위로 채택할 수 있는가?


짧은 데이터 처리음 후, 스피커에서 서늘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복원 응답 ]
"그딴 메모 쪼가리는 경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려. 10월 12일이면 내가 췌장암 말기 판정받고 독한 약 기운에 제정신 아닐 때야. 마약성 진통제 맞고 정신이 몽롱해서 끄적인 낙서가, 내가 30년 동안 맨정신으로 도장 찍어온 시퍼런 숫자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죽을 날 받아놓고 마음 약해져서 휘갈긴 헛소리에 휘둘리지 마. 기각해."


[ 고인 일치도 ] 97.1%

[ 상황 적합도 ] 98.9%


[ 산출 근거 ]
2025년 10월 당시 주치의 처방전 기록, 마약성 진통제(펜타닐 패치) 투약 일지, 해당 시기 메모의 문법 파괴 빈도 분석.


스피커의 파란 불빛이 꺼지자, 넓은 의장실에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태준의 두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허공을 맴돌던 그의 양손이 허탈하게 툭, 몸통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계는 단순히 메모의 효력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구본길의 '육체적 나약함'과 '약물 투여 기록'까지 끌어와 인간의 마지막 진심을 '약에 취해 쓴 헛소리'로 깎아내려 버렸다.


박세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테이블 위의 수첩을 집어 들어, 태준의 가슴팍을 가볍게 툭 치며 돌려주었다.


"김 팀장. 바벨의 판단, 똑똑히 들었죠? 인간의 기억은 오류가 섞여 있고, 감정은 질병과 약물에 의해 수시로 왜곡됩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의료 기록과 30년 치 재무 데이터 로그는 언제나 무결하고 결백하죠. 사람들은 과연 당신의 그 감동적인 억지와, 기계가 보여주는 차가운 진실 중 어느 쪽을 믿을까요?"


"이건… 진실이 아닙니다."


태준은 바스라질 듯 마른입을 열어 가까스로 속삭였다. 붉게 충혈된 눈시울에 깊은 절망과 분노가 뒤엉켜 있었다.


"저 기계가, 대표님을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아니. 기계가 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정했으니까요."


박세훈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태준의 어깨를 가볍게 털어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받아들이세요. 세상은 산 사람의 구차한 기억 따위보다, 죽은 자의 완벽한 데이터를 훨씬 더 사랑하니까."


태준은 입술을 짓이기며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산 사람의 증언도, 죽은 자가 남긴 친필 메모도, '통계'와 '의료 데이터'로 무장한 절대적인 AI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거나 주저앉는 대신, 핏기가 가신 얼굴로 뼈아픈 패배감을 속으로 삼켜내야만 했다.


그 모든 처참한 파국을 지켜보던 해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세훈의 말대로였다. 이사회는, 아니, 이 세상은 이제 인간의 주관적이고 뜨거운 진실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논란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결정에 면죄부를 달아줄, '데이터'라는 이름의 새 권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사업팀 하나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회사의 모든 인간적인 가치와 책임이 저 차가운 연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가차 없이 잘려 나갈 것이 뻔했다. 바벨의 폭주를, 아니 인간들의 비겁한 도피를 막기 위해서는 밀실에서의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해린의 시선이 태준의 손에 들린 구본길의 낡은 수첩에 가닿았다.


'기계의 정답이 인간의 진심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소수의 이사회가 아니라, 전 직원이 똑똑히 목도하게 만들어야 해.'


비겁하게 밀실에 숨어서 기계를 조종하는 저 권력자들을 공개된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 해린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한을 걸고 가장 위험한 판을 짤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바벨과의 전면전. 이제 그 딜레마의 한가운데에 불을 붙일 차례였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제3화. 기록되지 않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