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새벽 2시 15분.
여의도 SNC 본사 11층 COO 집무실.
창밖의 마천루들이 하나둘 불을 끄고 도시가 깊은 밤으로 침잠하는 시간이었지만, 양해린의 모니터는 여전히 창백하고 서늘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화면에 띄워진 것은 어제 낮, 신사업팀의 운명을 단숨에 끝장내버린 제2호 바벨 세션의 백엔드 연산 로그였다.
그녀의 핏발 선 시선이 수만 줄의 코드 사이, 유독 붉은색으로 하이라이트 된 한 구역에 멈춰 섰다. 김태준이 회의실에서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던 그 순간, 바벨의 내부 연산기가 실시간으로 처리했던 '이의 제기'에 대한 분석 결과였다.
[ 바벨 연산 변수 충돌 보고서 ]
입력 변수: 김태준 팀장의 구두 증언
(발화 내용: "당장 돈을 못 벌어도 좋다, 너희 팀이 우리 SNC의 다음 10년이다")
시점 및 환경: 2025년 10월경 / 11층 복도 / 특정 개인 대상 사적 대화
시스템 분류: 비정형 데이터 및 공식 문서 교차 검증 실패
신뢰도 가중치 부여: 0.003%
최종 처리: 기각
해린은 마우스를 쥔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힘을 주었다.
'통계적 노이즈'.
김태준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부르짖었던 창업자와의 마지막 약속, 그 뜨거웠던 진심이 세이지의 무결점 시스템 안에서는 고작 소수점 아래 세 자리의 먼지 같은 숫자로 치부되어 휴지통에 처박혀 있었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보안 메신저를 열어 외부망 다이렉트 연결 버튼을 눌렀다. 수신자는 바벨 시스템을 총괄 설계한 세이지 본사의 수석 아키텍트, 정우진이었다. 밤낮없이 서버 클러스터를 모니터링하는 그라면 지금도 깨어있을 터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화면이 켜지며 정우진의 단정하고 피곤한 얼굴이 나타났다.
"늦은 밤에 연락을 다 주시고, 양 COO님. 어제 2호 세션의 결과에 기술적인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저희 쪽 무결성 점검 결과는 완벽한 정상으로 떴습니다만."
"기술적인 결함을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정 수석님."
해린은 마른입을 축이며 화면 속 우진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어제 세션에서 김태준 팀장이 제기한 구본길 대표님의 생전 발언 말입니다. '다음 10년을 맡긴다'는 그 말, 만약 그것이 정말로 사실이었다면요? 바벨이 그 중요한 진실을 누락한 채 잘못된 정답을 낸 것이라면, 시스템의 완벽성에 심각한 금이 가는 것 아닙니까?"
정우진은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뒤로는 세이지 본사의 거대한 클라우드 서버 랙들이 기괴한 심장처럼 푸른빛을 점멸하며 숨 쉬고 있었다.
"COO님. 무언가 시스템의 본질을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것 같군요. 바벨은 그 발언을 누락하거나 거짓말이라고 판단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김 팀장의 말이 100%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연산을 수행했습니다."
해린의 눈이 커졌다.
"사실로 전제했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해체하라는 결론이 그토록 단호하게 나올 수 있습니까?"
"가중치의 문제입니다."
우진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해린의 모니터 우측으로 거대한 벨 커브 그래프가 띄워졌다. 그래프의 중심에는 빽빽한 데이터들이 거대한 산처럼 솟아 있었고, 가장자리 끄트머리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구본길 대표님이 30년간 SNC를 이끌며 남긴 공식 결재 서류, 재무 판단, 구조조정 지시, 주주총회 발언… 그 모든 명확한 문서 기록이 18,942건입니다. 이 압도적인 데이터들은 일관되게 '적자 생존'과 '무자비한 비용 통제'라는 하나의 거대한 중심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진의 손가락이 화면 속 그래프의 거대한 산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내 가장자리의 초라한 붉은 점으로 이동했다.
"반면, 김 팀장이 주장한 '다음 10년'이라는 감정적인 격려는, 평생 단 한 번도 공식 문서로 기록된 적 없는 비정형 데이터입니다. 18,942 대 1. 양 COO님. 구 대표님이 병상에 누워 죽음을 직감하고 잠시 감상에 젖어 남긴 그 한마디가, 30년 동안 남의 피를 묻히며 회사를 키워온 냉혹한 경영 철학 전체를 뒤집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해린은 말문이 막혔다. 서늘한 논리가 그녀의 목을 틀어쥐는 것 같았다.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은 철저히 '평균값'으로 정의됩니다. 가장 빈번하게, 가장 확실한 문서로 남긴 행동들의 총합이죠." 우진의 목소리는 한없이 정중했으나 그 안의 뼈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바벨은 고인의 인간성을 삭제한 게 아닙니다. 단지, 고인의 삶 전체를 통계 내어 보았을 때 죽음 직전의 그 감정적 나약함이 '통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연산했을 뿐입니다. 튀어나온 모난 돌, 즉 시스템 최적화에 방해가 되는 '노이즈'로 분류해 깎아낸 거죠."
"그 노이즈가…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마지막에 깨달은 진심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인간은 변하니까요!"
해린의 떨리는 목소리에 정우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심은 데이터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COO님. 인간은 평생 수많은 말을 뱉고 후회하고 번복하지만, 결국 법적 효력을 갖고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도장이 찍힌 계약서뿐입니다. 바벨은 계약서에 피도 눈물도 없이 도장을 찍던 '가장 책임감 있고 이성적인' 구본길만을 영원히 복원해 낸 완벽한 페르소나입니다. SNC 이사회가 저희 시스템을 도입한 진짜 이유도 그것 아닙니까? 늙고, 병들고, 약해진 인간 구본길이 아니라… 언제나 가장 확실하고 책임 없는 정답을 쥐여주는 '무결점의 도살자'를 원하셨잖아요."
화면이 까맣게 죽으며 통화가 끊어졌다.
해린은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스템은 단 하나의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 기계는 인간들이 음습하게 요구한 대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도출해 냈다.
구본길은 30년을 차가운 승부사로 살다가 마지막 1년 동안 뼈저린 인간적인 후회를 겪었지만, 그는 그 후회를 끝내 공식적인 서류로 남기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인간의 회한은 AI의 거대한 연산 속에서 한낱 오차 범위로 치부되어 완벽하게 증발해 버렸다.
* * *
아침 8시 30분.
SNC 본사 10층.
해린은 핏발 선 눈으로 신사업팀 사무실을 찾았다.
이미 파티션 곳곳이 텅 비어 있었고, 직원들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종이 상자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사내 게시판에 부서 해체 공고가 뜬 지 불과 10시간 만의 일이었다.
누구 하나 핏대를 세우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억울하다며 짐을 집어 던지는 사람도 없었다. '완벽한 AI'가 내놓은 통계적 정답 앞에서, 반발할 동력조차 완전히 상실해 버린 기괴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팀장실 구석, 김태준은 책상 위 자신의 명패를 가만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제 회의실에서 뿜어내던 맹수 같은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껍데기만 남은 듯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태준 씨."
해린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가 초점 잃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COO님. 혹시… 제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요?"
태준의 쩍쩍 갈라진 쉰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유령처럼 맴돌았다.
"무슨 소립니까? 태준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기계의 알고리즘이 당신의 진심을…"
"아니요." 태준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내내 뜬눈으로 생각했습니다. 94.8%의 일치도. 대표님이 30년 동안 남긴 1만 8천 건의 그 압도적인 데이터들. 그것들이 전부 우리 팀을 해체하는 게 맞다고 가리키고 있는데… 나 혼자만 대표님이 우리를 끝까지 안고 가려 하셨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해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대표님이 복도에서 제 두 손을 잡았던 그날. 사실은 나를 다음 세대로 인정한 게 아니라, 그저 적자만 내는 놈이 불쌍해서 동정했던 건 아닐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간절한 나머지, 대표님의 그저 그런 덕담 한마디를 '다음 10년'이라는 거창한 유언으로 혼자 착각하고, 내 스스로 기억을 유리하게 조작해버린 건 아닐까요?"
"태준 씨! 당신 기억이 맞아요. 바벨은 그저 서류에 적힌 확률만 무식하게 계산했을 뿐입니다. 당신을 위로하던 대표님의 온기가 가짜라는 뜻이 아니라고요!"
해린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태준의 얼굴에 번진 허탈하고 기괴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오류투성이고, 죽은 자의 데이터는 결백하잖아요. 박세훈 의장님이 어제 그러셨죠. 저도 이제… 제 기억을 못 믿겠습니다. 구본길이라는 위대한 경영자의 무결점 데이터가, 저더러 쓰레기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수학적으로 증명해 버렸으니까요."
태준은 명패를 종이 상자 안에 툭 던져 넣고는 묵묵히 걸어 나갔다. 해린은 멀어지는 그의 무너진 뒷모습을 끝내 붙잡지 못했다.
바벨이 앗아간 것은 단순히 신사업팀의 존속이나 200억의 투자금이 아니었다.
완벽하고 무결한 기계의 '통계적 진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평생 품고 있던 가장 뜨겁고 소중한 기억마저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 종내에는 스스로를 오류로 규정하며 파괴하게 만들었다. 그것이야말로 데이터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가장 끔찍한 방식이었다.
해린은 쇳덩이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와, 유리창 너머로 회사의 대형 주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신사업팀 해체와 특허 매각 공고가 뜬 직후, SNC의 주가는 어제의 낙폭을 보란 듯이 비웃으며 무서운 속도로 치솟고 있었다. 시뻘건 화살표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아우성쳤다.
누군가의 뜨거운 진심이 한낱 통계적 오류로 취급되어 영원히 압살당한 이 아침.
세상은 바벨의 잔혹한 정답에 미친 듯이 환호하며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었다. 인간의 나약함은 기계의 무결성 앞에 완벽하고도 처참하게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