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면죄부의 도입

by TAFO

월요일 오전 10시.

여의도 SNC 본사 12층 이사회 회의실.


무거운 마호가니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여덟 명의 이사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통유리창 밖으로는 잿빛 하늘 아래 한강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고, 테이블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오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안건이 띄워져 있었다.


[동남아시아 물류 거점 통폐합 및 구조조정안]

쿠알라룸푸르, 조호르바루, 자카르타.


세 곳으로 분산된 SNC의 동남아 거점 중 최소 한 곳의 문을 닫고 대규모 인력을 쳐내야 한다는 것은 이 방에 앉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글로벌 물류 대란과 유가 폭등 속에서 SNC의 영업이익은 3분기 연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문제는 결국 누가 그 결정을 자기 이름으로 감당할 것인가였다.


특히 1순위 타겟인 쿠알라룸푸르 거점은 1년 전 세상을 떠난 SNC의 창업자, 구본길 전 대표가 생전 마지막으로 직접 테이프를 끊었던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곳을 폐쇄하고 400명이 넘는 현지 직원을 하루아침에 내보낸다는 것은, 죽은 창업자의 마지막 유산을 스스로 접는 결정으로 읽힐 수 있었다. 언론의 질타와 노조의 맹렬한 반발을 정면으로 떠안아야 하는 일이었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박세훈 의장이 헛기침을 하며 금테 안경을 치켜올렸다.


"다들 자료는 충분히 검토하셨을 테고. 재무팀의 분석이나 유동성 지표를 보면 쿠알라룸푸르 폐쇄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건 명백합니다만... 현지 노조의 극렬한 반발이나, 돌아가신 구 대표님의 설립 취지를 생각하면 참, 이사회 차원에서 선뜻 결단을 내리기가 껄끄러운 사안입니다."


'껄끄럽다.'


그 한 단어가 이 화려한 회의실에 모인 엘리트들의 실제 속내였다. 그들은 무너져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당장 거점을 접고 싶었지만, 죽은 창업자의 뜻을 거스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도덕적 비난과 책임의 무게가 서로의 눈치 속에서 테이블 위를 맴돌고 있을 때, 양해린 최고운영책임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오늘, 그 껄끄러움을 이사회 대신 짊어질 새로운 솔루션을 준비했습니다."


해린의 차분한 선언과 함께 손짓이 이어지자 스크린의 화면이 전환되었다. 깊은 검은 배경 위로, 낯선 푸른색의 육각형 로고가 천천히 회전하며 떠올랐다.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식었다.


[ 바벨 ]
접속 승인 대기 중...


"글로벌 AI 개발사 세이지에서 런칭한 최고위급 의사결정 시스템, '바벨'입니다. 우리 SNC는 지난 3개월간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구본길 대표님의 30년 치 경영 데이터, 사내 결재 서류, 외부 인터뷰, 심지어 재무 판단의 통계적 패턴까지 완벽하게 세이지의 클라우드 서버에 학습시켰습니다."


오창석 재무팀장이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양 COO. 지금 저 외부 기계 장난감이 우리 구조조정 안건에 답을 내려준다는 겁니까? 수백억의 손실과 400명의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해린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오창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장난감이 아닙니다, 오 팀장님. 바벨은 감정이나 피로, 정치적 눈치, 혹은 도덕적 죄책감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오직 구 대표님이 30년간 증명해 온 '가장 확률 높은 선택'을 고인의 페르소나로 복원해 낼 뿐입니다. 인간의 편향이 배제된 객관성이죠."


박세훈 의장이 깍지 낀 손을 턱에 괸 채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결한 객관성이, 구 대표님의 입을 빌려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군요. 연결하시죠."


해린이 콘솔에 마스터 키를 꽂고 보안 코드를 입력했다.


짧은 파열음과 함께 스크린 하단으로 무수한 데이터 로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낮은 연산음이 회의실 바닥을 미세하게 울렸다. 이내 테이블 정면에 놓인 스피커에서 얇은 화이트 노이즈가 흐르더니, 믿기 어려울 만큼 익숙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들숨조차 느껴지지 않는 매끄러운 기계적 호흡. 문장 끝을 짧고 날카롭게 끊어내는 특유의 습관. 놀라울 만큼 정확한 창업자 구본길의 육성이었다.


[ 복원 대상 ]
고(故) 구본길 SNC 전 대표 / 데이터 코드 S-00


[ 복원 응답 ]

"조호르바루로 통합시켜. 쿠알라룸푸르는 당장 셔터 내리고. 다 지난 일에 감정 낭비할 시간 없어. 회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데 계란을 나눠 담아? 한 놈한테 책임 몰아주고 죽기 살기로 밀어붙여야 버티는 거야. 현지 인력은 원칙대로 싹 다 쳐내."


[ 고인 일치도 ] 98.2%
[ 상황 적합도 ] 97.5%


[ 산출 근거 ]

1998년 IMF 창원 공장 매각 및 대규모 인력 감축 결재 서류

2008년 금융위기 당시 2차 구조조정 지시 녹취록

평소 위기 대응 시 화법 및 단기 유동성 확보 최우선 의사결정 패턴 대조


스크린에 뜬 명확한 텍스트 데이터와, 스피커를 차갑게 울리는 육성.


기계는 어떤 변명도, 어떤 위선도 덧붙이지 않았다. 오직 회사의 생존이라는 목적 하나만 남긴 채, 과거 구본길이 보여주었던 가장 냉정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오차 없이 끄집어냈다.


회의실에는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해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임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400명의 삶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결정 앞이었다. 누군가는 반발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고뇌나 미안함이라도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목격한 것은 놀라울 만큼 분명한 '안도감'이었다.


늘 굳어 있던 박세훈 의장의 미간이 온화하게 풀려 있었다. 반론을 벼르고 있던 오창석 재무팀장 역시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동료를 잃는 슬픔이나 결정에 대한 고뇌가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해방감'에 가까웠다.


박세훈이 테이블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흡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구 대표님이 직접 이 방에 돌아오셔서 고뇌 어린 결단을 내려주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창업자의 위대한 유지가 400명을 안고 다 같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아서라도 우리 SNC를 살리는 것임이 이렇게 명백한 데이터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임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노조가 아무리 길거리에 나앉아 반발해도 이젠 완벽한 명분이 섭니다."


"이건 우리 임원진이 피도 눈물도 없어서 사람을 자르는 게 아닙니다. 창업자의 숭고한 경영 철학을 과학적으로 복원한 결과에 겸허히 따르는 것뿐이니까요."


순간, 해린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박세훈과 임원들은 처음부터 쿠알라룸푸르를 폐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결정에 수반되는 도덕적 비난과 책임의 무게는 짊어지기 싫었다. 그런데 저 완벽하고 결점 없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나타나, 자신들의 속내를 '창업자의 위대한 결단'이자 '과학적 진리'로 포장해 준 것이다.


바벨 시스템은 이사회에게 단순한 경영의 정답을 준 것이 아니었다.


누구의 원망도 직접 감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칼을 들지 않은 채 400명을 내보낼 수 있는 투명한 '면죄부'를 발급해 준 것이다.


"양 COO."


박세훈이 전에 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해린을 불렀다.


"수고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시스템을 들여왔군요. 앞으로 우리 SNC의 모든 중대한 의사결정은, 저 바벨을 최우선으로 참고하여 진행하도록 합시다. 더 이견 없으시죠? 표결하겠습니다."


결과는 찬성 여덟, 반대 없음.


단 5분 만에 이루어진 만장일치 가결.


해린은 모니터 속에서 차갑고 푸르게 명멸하는 바벨의 로그 기록을 가만히 응시했다. 무결점의 기계가 내려준 잔혹한 정답 아래에서, 인간들은 기꺼이 자신의 책임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 넓고 화려한 회의실에 이제 산 사람의 고뇌나 책임감이 설 자리는 없었다.


효율적이고, 합법적이며, 비명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지옥의 문이 마침내 SNC 본사 12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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