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통계와 진심

by TAFO

화요일 오전 9시.
여의도 SNC 본사 12층 이사회 회의실.


공기는 메말라 있었다. 임원들의 얼굴에는 전날 400명을 정리하는 결정을 내린 뒤의 안도감을 넘어, 희미한 권태마저 서려 있었다. 긴 타원형 테이블의 끝에 선 신사업팀장 김태준의 이마에만 차가운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다시 한번 간곡히 말씀드리지만, 신사업팀의 당장 적자는 예정된 수순입니다. 우리가 구축 중인 AI 물류 솔루션과 B2B 구독 플랫폼은 초기 인프라 세팅에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업계 표준으로 시장을 선점하는 순간 기하급수적인 이익을 가져옵니다. 딱 2년입니다. 2년만 더 버티면..."


"태준 씨."


상석에 앉은 박세훈 의장이 테이블 위를 마호가니 볼펜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끊었다.


"그 2년이라는 전망을 위해 우리가 매달 쏟아붓고 있는 돈이 얼만지 압니까? 누적 214억입니다. 글로벌 물류 대란 속에서 SNC 전체 영업이익의 15%를 깎아먹고 있다고요. 게다가..."


박세훈은 깍지 낀 손 너머로 태준을 나직하게, 그러나 매섭게 응시했다.


"당신 팀, 대표님이 병상에 눕기 직전에 급하게 만들어진 조직 아닙니까? 성과도, 비전도 객관적인 데이터로 검증된 바가 전혀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태준의 눈빛에 분노가 어렸다. 그는 두 손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짚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검증이 안 되었다고요? 구 대표님이 직접 발탁하셨습니다! 쓰러지시기 불과 한 달 전, 저를 11층 복도로 따로 불러내서 제 두 손을 꽉 잡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돈을 못 벌어도 좋다, 너희 팀이 우리 SNC의 다음 10년이다'라고요! 그게 창업자의 분명한 유지입니다!"


태준의 절박한 호소에, 회의실 안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이 돌았다.


죽은 창업자의 인간적인 온기와 절박함이 담긴 유언. 과거였다면 이 명분 앞에서 이사회 임원들은 쉽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일말의 당황스러움도 없었다.


오창석 재무팀장은 아예 태블릿의 주가창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았고, 박세훈 의장은 묘한 동정심마저 담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양해린 COO를 돌아보았다.


"산 사람의 흐릿하고 절박한 기억과, 죽은 자의 명확하고 차가운 데이터. 어느 쪽이 우리 SNC를 위한 진짜 '창업자의 뜻'인지 확인해 볼 시간인 것 같군요. 양 COO. 세이지 쪽에 연결하시죠."


해린은 묵묵히 콘솔의 마스터 키를 돌렸다.
그녀 역시 태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태준의 눈동자에 맺힌 억울함은 진짜였다. 하지만 해린의 손끝에서 시스템이 기동하는 순간, 인간의 뜨거운 진심은 세이지의 클라우드 연산망 속으로 들어갔다.


[ 바벨 ]
안건: 신사업팀(누적 적자 214억)의 유지 및 추가 투자 여부
연산 변수: 고(故) 구본길 전 대표의 30년 치 재무 결정, 리스크 관리 패턴, 신사업 철수 기준 (총 18,942건 참조)


푸른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웅장한 스피커에서 서늘한 기계음이 파열했다. 어제 쿠알라룸푸르의 폐쇄를 명했던, 구본길의 완벽한 억양을 입은 바벨의 목소리였다.


[ 복원 응답 ]
"신사업팀 당장 해체시켜. 들고 있는 AI 물류 솔루션인지 뭔지 하는 특허는 당장 시장에 내다 팔아서 현금부터 융통하고. 신사업 한답시고 무능한 놈들이 적자 내는 걸 언제까지 방패막이 쳐줄 줄 알았어? 돈 벌 구멍도 안 보이는데 200억씩 까먹는 짓거리를 2년이나 끌고 가는 건 내 30년 장사꾼 인생에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야. 회사가 살고 봐야지, 희망 고문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 집어치워."


[ 고인 일치도 ] 94.8%
[ 상황 적합도 ] 95.1%


[ 산출 근거 ]
과거 30년 재무 판단 기준, 누적 적자 부서 철수 패턴, 유동성 위기 시 신사업 정리 속도, 평균 의사결정 회수 기간 (총 18,942건 교차 검증)


방 안의 공기가 날카롭게 굳어졌다. 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말도 안돼!"


태준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스크린을 향해 소리쳤다. 임원들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짓말입니다! 대표님은 분명히 저한테 다음 10년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저깟 기계 덩어리가 지금 대표님의 마지막 말을 비틀고 있는 겁니다!"


바벨의 푸른 육각형 로고가 태준의 절규에 반응하듯 일렁였다. 시스템은 마이크를 타고 들어온 태준의 음성 데이터를 실시간 '이의 제기 질의'로 인식했다. 그리고 방대한 데이터를 0.1초 만에 뒤져 곧바로 응답을 내놓았다.


[ 실시간 질의 응답 ]
"김태준 팀장. 자네가 우겨대는 그 '다음 10년' 운운하는 소리는 내 결재 서류, 녹취록, 회의록 어디를 뒤져봐도 쪼가리 하나 안 나와. 객관적으로 증명도 못 하는 자네 머릿속 기억 따위는 기업 굴리는 데 하등 쓸모없는 찌꺼기, 그러니까 '노이즈'일 뿐이야. 백번 양보해서 내가 병원 신세 지면서 마음이 약해져 복도에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다 한들, 그게 30년 동안 피도 눈물도 없이 증명해 온 내 원칙을 뒤집을 근거가 되지는 못해."


해린은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바벨은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세이지의 알고리즘은 단 한 줄의 오류도 없었다. 오히려 기계는 너무 '정확'했다.


구본길은 평생을 냉혹한 승부사로 살았다. 그의 생애 90%는 숫자와 효율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죽기 직전, 병상에 누워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고 태준의 손을 잡으며 남겼던 10%의 인간적인 고뇌와 미련은… 바벨의 거대한 '통계 연산' 앞에서는 유의미하지 않은 데이터로 기각되어 버린 것이다.


기계는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약해지거나 스스로를 뉘우칠 수 있다는, 그 비논리적인 진심의 변화를 연산하지 못했다. 바벨은 구본길의 30년 치 삶의 '평균값'을 내어, 그를 영원히 늙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냉혹한 경영자로 고정해 놓았다.


"들으셨죠, 김 팀장."


박세훈이 흡족한 얼굴로 서류를 탁탁 치며 회의를 정리했다.


"기계가 참 정직하고 훌륭합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구 대표님의 진짜 경영 철학을 숫자로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일치도가 94.8%입니다. 개인이 복도에서 들었다는, 증명조차 못 할 사담을 믿고 200억을 더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사회는 바벨의 결론을 전적으로 수용합니다."


태준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의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목숨처럼 여겼고 맹세했던 창업자와의 약속이, 방금 18,942건의 방대한 데이터 연산 앞에 부정당했다. 살아 있는 인간의 진심이 기계의 차가운 통계표 아래 깔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양 COO."


박세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어서며 해린을 불렀다.


"오늘 안으로 신사업팀 해체 및 특허 매각 공고 사내망에 올리세요. 혹시라도 불만을 품는 직원이 있다면 이 바벨 세션의 녹취록을 전사 공개하시고. 감히 창업자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직원은 없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해린의 대답은 까끌까끌하고 건조했다.


박세훈과 임원들은 미련 없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등 뒤로는 짐을 내려놓은 사람들의 홀가분함이 묻어났다. 신사업팀을 날려버리고 수십 명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죽은 창업자의 뜻'을 '완벽한 AI'가 증명해 주었으니, 그들은 그저 과학과 데이터의 결론에 따랐을 뿐이라는 알리바이를 챙겼다.


넓은 회의실에는 시스템 종료를 알리며 차갑게 꺼져가는 바벨의 푸른 잔광과,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쥔 김태준, 그리고 자신이 SNC라는 회사에 대체 무엇을 끌고 들어온 것인지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양해린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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