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심이 깨진 날은 바로 그날이었다. 전설의 엘드라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날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계속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기 곤란한지 엄청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응, 현아. 엄마 바쁜데 왜?”
“엄마! 엘드라고 언제 와?”
“엘드라고? 엘드라고가 뭔데?”
“왜! 왼쪽으로 도는 엘드라고 팽이!”
그제야 엄마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 팽이...”
“엄마가 사준다고 했잖아. 언제 오느냐고?”
엄마는 그날 저녁 전설의 엘드라고를 사느라고 생각보다 훨씬 늦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는 것을 깜빡한 엄마가 미안한 마음에 판매점에 직접 다녀온 것이다. 나는 저녁도 굶은 채 엄마를 기다렸다. 전설의 엘드라고.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팽이들을 한방에 날려버린다는 좌회전팽이. 오른쪽 팽이들과 부딪치면 오히려 회전하는 힘을 더 받아서 강해진다는 팽이! 그 팽이를 내 손에 쥐었을 때는 이미 밤 여덟 시가 넘었다.
“이제 사 오면 어떡해?”
“야! 그 팽이 사느라고 엄청 힘들었어. 고맙습니다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엄마의 지친 목소리에 나도 괜히 기가 죽었다.
“고맙습니다...”
“고깟 팽이가 뭐라고. 아휴. 배고프다. 밥 먹자.”
아닌 게 아니라 엄마는 걸을 힘도 없는지 발을 질질 끌면서 걸었고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뭐라고 할 시간이 없었다. 팽이 포장지를 뜯어서 바닥에 던진 다음 팽이판 위에 팽이를 돌려보았다. 사용감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돌리는 순간 감이 좋지 않았다.
“뭐지? 왜 이렇게 약하게 돌아? 이래서 이길 수 있겠어?”
뭔가 기세 좋게 돌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와 달리 엘드라고는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돌았다. 나는 집에 있는 우회전 팽이들을 그 옆에 넣어보았다. 탱! 탱! 탱! 서로 번갈아서 부딪히더니 엘드라고가 갈팡질팡했다. 급기야 멈춰 쓰러졌다. 탱, 탱, 탱, 죽은 팽이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우회전 팽이들이 쓰러진 엘드라고의 몸체를 치고 있었다.
‘먼저 돌려서 그렇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엘드라고를 건져내어 다시 팽이를 장착한 후 원, 투, 쓰리 고 슛을 중얼거리며 팽이를 던졌다.
‘그렇지, 그래. 잘한다.’
나는 엘드라고를 응원했다. 그 옆에 있는 우회전 팽이들도 내가 오랫동안 훈련시켰던 훌륭한 선수들이다.
“밥 먹어!”
엄마가 말했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나는 이 승부를 봐야 한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드라고가 기세 좋게 우회전 팽이들을 툭, 툭, 건드렸다. 우회전 팽이 하나가 한방에 툭 떨어졌다.
‘그렇지’
나는 나가떨어진 팽이가 친구들의 팽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엘드라고는 다시 남은 다른 팽이하고 부딪쳤다. 탱! 탱! 탱! 세 번 부딪쳤을 때였다. 충격이었다. 나가떨어진 것은 엘드라고였다.
“야! 밥 먹으라고!”
엄마는 겉옷만 벗은 채 회사에서 입던 옷 그대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거실 바닥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걸어갔다. 엄마는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아닌 게 아니라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팽이 부서졌어?”
“아니...”
엄마는 나한테 다가와서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엄마의 손은 젖어 있었다.
“뭐 때문에 그런데? 응? 엄마한테 말해봐.”
“엘드라고가... 엘드라고가.... 졌어. 분명 만화에서는 모든 우회전 팽이를 한방에 날려버린 전설의 엘드라고 팽이였는데. 우리 집에 있는 우회전 팽이한테도 져. 그럼 진수 팽이를 어떻게 이기냐고. 걔 팽이는 내 우회전 팽이들보다도 훨...씬 센데. 망했어. 아아아앙.....”
나는 세상이 미웠다. 그제야 나는 엄마의 지친 발걸음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 많은 팽이를 놔두고 엘드라고가 왜 나에게 필요했는지 엄마를 설득했던 그 많은 순간들, 엄마가 좋아하는 치과에도 가고, 엄마가 하라는 학습지도 50장이나 밀리지 않고 다 해 냈는데... 그뿐인가 엄마 기분 좋게 하려고 몇 날 며칠을 미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엄마가 팽이를 사 주기로 결정을 했고 회사 일로 바쁜 엄마를 하루 종일 괴롭혔던 것이다. 정말이지 다른 일 같으면 절대 전화하는 내가 아니다. 엄마는 회사에서 일할 때 전화받기 곤란하니 되도록 문자를 보내고 정말 급할 때만 전화하라고 했었다. 최근에는 정말 딱 한 번 전화했었다. 친구 따라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었다. 친구는 자기네 집 앞을 지나서 쭉 가면 우리 집이 나올 거라고 했는데 알려준 길 끝은 막힌 길이었다. 위치상으로는 우리 집 방향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높은 담장이 가로막고 있는 길을 어떻게 간단 말이냐. 그래서 다시 친구네 집 방향으로 내려왔는데 그다음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쪽으로도 가보고 저쪽으로도 가보았는데 도저히 아는 길이라고는 없었다. 그때 나는 너무 무서웠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길을 묻자니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 집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세요, 하자니 그 사람이 내가 너희 집이 어딘 줄 알고 알려주니, 할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했었다. 엄마는 내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헉, 소리가 나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엄청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혀, 현아. 당황하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나는 엄마가 더 당황한 것 같다고 느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엄마는 내 위치를 물었지만 나는 집들만 잔뜩 있다고 했고 어딘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옆에 지나다니는 사람 있어, 없어?”
그때 옆에 아저씨 한 사람이 지나갔다. 나는 아저씨를 힐끔 보고 조그맣게 말했다.
“있어.”
“그래, 그러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잘 보고 제일 친절해 보이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 갈산초등학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그 사람이 알려주는 대로 갈산초로 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건 할 수 있잖아. 그렇지?”
나는 엄마 말대로 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이지 나는 그렇게 위기의 순간에만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신중하고 예의 바르며 배려심 깊은 아들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전설의 엘드라고 팽이에 꽂혀서 내가 예의도 잊고, 범절도 잊어버린 채 정말 바쁜 엄마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렇게 얻은 그 전설의 엘드라고 팽이가 고작 이 정도라니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슬펐고 세상에 대한 모든 믿음이 무너졌다. 그래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내가 다시는 그 애니메이션을 보나 보자, 그 내용을 다시 믿으면 나는 초등학생이 아니라 유딩이다 유딩!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이제 팽이를 끊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아빠의 말에도 굴하지 않았던 나였는데, 진수가 포기하지 않는 한 나에게도 포기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나는 나의 유년 시절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 속에서는 배고프다고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고 목에서는 서럽다고 꺼이, 꺼이, 소리가 났다. 엄마는 그 저녁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된 것을 보며 힘없이 앉아 있었다.
띠,띠,띠,띠 띠리링
현관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왔다.
“염둥아, 아빠 왔다. 어? 우리 염둥이 왜 울어?”
아빠는 내가 귀엽다고 맨날 염둥이라 부른다. 엄마가 그토록 사고 싶었던 좌회전 팽이가 기대할 만큼 강력하지 않아서 상심이 큰 것 같다고 설명해 주었다.
“허억? 팽이를 또 사줬어?”
아빠는 엉뚱한 데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엄마는 살짝 당황하면서 치과 치료도 군말 없이 받았고 학습지도 일주일 내내 밀리지 않고 열심히 해서 상으로 사주었다고 말했다. 아빠는 겉옷을 벗은 다음 내 손을 이끌면서 말했다.
“류현! 이리 앉아 봐.”
아빠는 팽이 판 앞에 나를 앉혔다.
“사나이가 이딴 일로 울 일이야?”
엄마는 밥 먹고 나서 하라고 말했다. 아빠는 배 많이 안 고프다고 말했다. 거짓말이다. 아빠는 맨날 여덟 시에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허겁지겁 과식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벌써 여덟 시 하고도 30분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내 앞에 앉았다. 아빠는 나를 혼낼 것처럼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살짝 기가 죽었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빠는 팽이를 손에 들었다. 아빠는 팽이를 런처에 장착하는 법도 몰라서 꼼지락거렸다. 나는 답답해서 내가 직접 장착해 주었다.
“아, 이렇게 하는 거야? 우리 염둥이 잘하네?”
아빠의 말투가 부드러워져서 나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자, 그럼 아빠랑 한번 해보자. 이게 엘 머시기야?”
“응, 엘드라고.”
“아, 그렇지 엘드라고.”
아빠는 세게 팽이를 발사시켰다. 탱, 탱, 탱.... 아빠와 나는 30분가량 열심히 팽이를 바꿔가며 배틀을 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졌는데 차츰 요령이 붙은 아빠가 이길 때도 있었다. 아빠는 그러더니 꼼지락꼼지락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씩, 웃으면서 말했다.
“비법을 알려줄 테니 이제 밥 먹자.”
아닌 게 아니라 밥을 안 먹어서인지 나는 기운이 없었다. 엄마는 식은 국을 다시 데워주었다. 밥은 맛있었다. 아빠는 밥을 우적우적 먹으면서 말했다.
“현아, 팽이 그렇게 잘해서 뭐 하려고? 팽이 선수 하려고?”
나는 말했다.
“팽이 선수할 수도 있지. 지난번 마트 갔는데 팽이 대회 하더라고.”
아빠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앞으로 인생 살면서 지금 팽이에 대한 마음처럼만 살면 못 할 게 없겠다. 우리 현이 최고!”
아빠는 내 등을 툭, 툭, 쳐주었다. 갑자기 밥이 맛있어졌다. 나는 밥도 국도 씩씩하게 다 먹었다.
“자, 이제 비법 알려줘.”
“현이 너 가위바위보 알지?”
“응”
“가위 바위 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세?”
나는 아빠의 질문에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본 다음 말했다.
“딱히 센 게 어딨어? 가위는 보한테 세고, 보는 바위한테 세고 그런 거지.”
아빠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내가 보니 네 팽이들도 그렇더라고. 팽이마다 이름이 있지만 나는 잘 모르니까 대충 이렇게 부를게. 노란 팽이는 파란 팽이를 이기더라고, 파란 팽이는 연두 팽이한테 강하고. 반면 연두 팽이는 보라 팽이한테 강해.”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인~~~~짜?”
“그렇다니까? 엘드라고는 그럼 어떤 팽이를 이기는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더니 아빠가 말했다.
“그건 네가 찾아보면 돼. 즐거운 탐구 시간~”
아빠는 자리에 일어나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던 아빠가 다 씻고 나왔을 때 나는 소리쳤다.
“아빠 아빠!! 알아냈어. 엘드라고는 페가수스를 이겨!”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진수가 페가수스를 낼 때 너는 엘드라고를 내면 돼. 류현 선수 파이팅!”
나도 아빠랑 같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내가 가진 팽이들을 줄을 세워 놓고 열심히 돌렸다. 그 밤 나의 팽이판 베이스타디움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