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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터리 공작소 Feb 05. 2020

맥주가 있었다. 그뿐이다.

나는 맥주를 마셨다. 

2009년이었다. 


"으이구, 저질, 변태 과장님~"

나는 투다리에 앉아 있다. 5시에 칼퇴근을 하고 바로 회사 근처의 투다리에 와서 맥주를 마시며, 왕년에는 내가 말이야... 하며 주저리주저리 하고 있다. 내 앞에 앉아 술친구를 해주는 아가씨는 다른 부서 직원인데 올해 28살이다. 아주 귀여운 스타일이지만 울트라 한 미녀라고는 할 수 없다. 가슴은 크다. 본인도 그 부분에서는 자신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얼마 전 빈말로 술 한잔 사주기로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오늘 이렇게 끌려와 앉았다. 


회사 옆의 시장 골목에 있는 투다리다. 모든 투다리가 그렇듯이 빨간색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인테리어, 투다리 로고가 새겨진 검은 앞치마, 붉은 티셔츠, 그리고 일본어가 적힌 알 수 없는 것들이 벽에 붙어 있다. 그렇다. 일본풍이 약간 느껴지는 곳이 투다리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맥주를 마시러 왔다. 안주도 저렴하고 나 같은 박봉의 월급쟁이에게는 딱인 술집인 것이다. 맥주는 한 병에 3천 원, 오뎅탕은 5천 원, 내 능력에 제격인 술집이다. 오뎅을 굳이 어묵이라고 하기는 싫다. 메뉴판에도 어묵탕 아니고 오뎅탕이라고 당당히 적혀있다. 오뎅은 그냥 오뎅인 것이다. 일본어라서 안된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뎅은 오뎅이고, 다꾸앙은 다꾸앙인 것이다. 우동과 가락국수는 다르고 그냥 그대로 불러주면 된다. 그냥 어느 나라 음식 이름일 뿐이다. 피자는 이태리 빈대떡 아니고 피자이고 햄버거는 햄버거로 불리는 것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듯이.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자주 애용하는 이 투다리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와 아주 가깝다. 회사 정문을 나와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슬슬 걸어가다 보면 하수구 구멍에 다 피운 담배꽁초를 던져 넣을 때쯤 투다리 문 앞에 도착할 수 있다.  고려 공민왕 23년, 그러니까 1374년 지금의 마산 합포만으로 왜구가 침입하자 이름은 알 수 없고 장장군이라고 훗날 묘비에 적힌 사람이 관군과 합세하여 왜구를 물리치고 전사하였다는 장장군의 묘가 있다는 장군동.(참고로 회사에서 나와 장군동과 반대쪽으로 가면 투다리 몽고점이 있다. 이곳도 나의 단골가게이다. 바로 근처에 몽고정이 있다.) 그 시장 골목에 있는 투다리의 주인은 사십 대 초반의 여자다. 이 여사장은 음식도 만들고 직접 서빙도 하고 혼자서 가게를 운영한다. 좀 색다른 것은 이 여인네의 분위기가 왠지 고급 술집의 마담 같은 인상을 준다. 투다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옷차림. 뭐 딱히 투다리와 어울리는 외모를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진 않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이 동네가 오래된 곳이고 시장 골목이라 그런지 손님들은 대부분 사십 대 후반의 아저씨들이 주 고객이다. 가게 안은 기역자로 모양이다. 4인용 테이블이 다섯 개,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두 개, 비교적 좁다. 


간혹 손님이 너무 많고 바쁠 때면 묘령의 아가씨가 갑자기 나타나서 투다리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두르고 여사장의 일을 도와준다. 이 아가씨가 여사장을 부르는 호칭이 언니인 걸로 봐서는 그냥 알바생은 아닌 것 같다. 사장에게 언니라고 부르긴 쉽지 않을 테니. 하지만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른다. 대강 20대 중후반으로 보이고 예쁜 얼굴이다. 언제나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난다. 역시 그녀는 자신의 다리가 예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아주 예쁜 다리다. 치마 밖으로 나와 있지 않고 바지 같은 것에 감춰져 있어야 한다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 만큼. 내게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쯧쯧, 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남자는 다 그런 것이다라고 밖에는 변명할 말이 없지만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것이 속 시원하다. 아니라고 해봐야 거짓말이니 그냥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싶다.

하여간 이 가게가 바쁠 때만 볼 수 있는 임시직원 또는 알바걸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아가씨가 도와주러 오는 날이면 단골손님인 중년의 아저씨들은 신이 난 모양이다. 아저씨들은 서로 앞다투어 잠깐 옆에 앉아서 맥주 한 잔 하라고 권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실없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뿐이다. 알바 걸에게 터치를 하거나 추태를 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 여기는 조그만 동네라 나름 어는 선에선가 지킬 것은 지켜야 손가락질당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은 나도 말을 한번 건데 볼까도 했지만 결국 그만뒀다. 맥주를 마시러 왔다. 그뿐이다.

나는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았다. 나보다 높은 상사가 박 과장 오늘 술 한잔 하까? 하고 물으면 나는 집에 일이 있다고 하고 여기 와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 높은 얼굴들 회사에서 8시간 이상 봤으면 족하다. 시원한 맥주 맛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더구나 그들은 소주를 많이 마신다. 나는 소주가 싫다. 

5시에 칼퇴근을 하기 때문에 투다리 문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렸다 들어가는 손님은 내가 유일하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이래서 칼퇴근이 좋은가 보다. 하하.

내가 5시에 칼퇴근(2009년 기준)한다고 해서 특별히 훌륭한 회사를 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근로기준법에 충실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에는 주 5일제가 없다. 그런 단어는 단어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절대로 없다. 단지 주 40시간 근로시간제라고 나와있다. 흔히 하루 8시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면 한 주에 40시간이니까 주 5일제라고 말하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는 아직은 그런 법이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래도 보통의 회사에서는 격주로 토요일 휴무를 주어 주 5일제 근무를 하고 있겠지만, 우리 사장은 법을 잘 해석하는 인간이다. 격주라도 직원들이 토요일 오전 네 시간을 쉬는 꼴을 못 보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궁리 끝에 주 40시간만 지키면 위법이 아닌 것을 간파하고 월요일은 8시간,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7시간, 토요일 4시간 도합 위대한 주 40시간 근로시간제를 완성한 것이다. 하여 나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5시면 퇴근한다. 사장이 이딴 식으로 나오니까 나도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지킬 수밖에... 흠.. 나는 컵 속에 남은 맥주를 깔끔하게 목으로 넘겨 버린 후 다시 가득 채워 따랐다. 앞에 앉은 여직원도 잔에 남아 있는 맥주를 비운다. 잘 마신다. 멋지다. 그녀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자 바로 입술로 가져가지만 이번에는 입술과 앞니에 발라주는 정도만 마셨다. 맥주가 모자란다. 나는 테이블 위의 귀퉁이에 붙은 호출벨을 누른다. 우리가 앉은자리는 주방이 있는 곳에서 기역자로 꺾인 곳이라 가게의 여사장이 보이지 않는 자리이다. 투다리 앞치마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네~, 손님.” 이 귀여운 아가씨는 목소리도 귀엽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귀엽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맥주 두병을 더 주문한다. 쇼케이스 냉장고 쪽으로 맥주를 가지러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마주 보고 있을 땐 시커멓고 칙칙한 검은색 투다리 앞치마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녀의 다리가 뒤쪽으로 돌아서자마자 ‘나는 이렇게 예쁘게 걸어요’라고 묘령의 알바걸의 쭉 뻗은 양쪽 다리는 번갈아 가며 내게 말하고 있다. 예쁜 종아리다. 역시나 오늘도 칭찬할 만큼 짧은 청치마 아래로 그녀의 다리는 투다리를 종횡무진할 것이다. 박지성처럼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장을 누비듯 열심히 달릴 것이고, 그리고 이곳의 아저씨 손님들은 축구를 사랑하는 광팬들의 시선으로 그라운드 위를 누비는 그녀의 다리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따라다닐 것이다. 나 또한 그럴 것이고.... 앞에 앉아 있던 동료 여직원이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 “뭘 보고 계신 거예요?”라고 묻는다.‘다 알면서’ 내가 뭘 보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지만 물어본다. 그런 것이다. “저 다리...” 나는 나는 턱으로 알바걸 쪽을 가리킨다. “보니까 어떤데요?” 라며 살짝 눈을 흘긴다. “예쁘네.” 나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취해가는 중이므로. 다들 술탓을 한다. 나도 그렇다. 하하.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저질 과장님 하여간... 제가 나가면서 만져보고 싶어 하더라고 말해줄게요. 호호” “오~, 이런 기특한 부하 직원을 봤나. 제발 그래 주면 고맙고... 만져볼 수 있게 되면 다음에 또 한잔 쏠게.” 라며 나도 받아 준다. “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 이런 젠장. 여자의 웃음소리를 글로 표현 하기는 힘든 거 같다. 아무리 훌륭한 문자, 한글이라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런 경우의 여자의 웃음을 적절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재능이라고는 없으니. 쯧쯧. 그 사이 예쁜 다리만 떠다니는 서빙 아가씨는 우리 테이블에 와서 자신의 예쁜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선 것처럼 두병의 맥주를 아주 살며시 내려놓고 다시 돌아서 주방이 있는 쪽으로 꺾어서 돌아간다. 오늘도 호르몬이 넘쳐 나는 날이 될 것 같다. 20년 전 스무 살 그때처럼. 하여간 다시 20년 전으로 간다. 타임머신이 뭐 별거 있나. 이렇게 휙 가면 타임머신인 거지.

두 병의 맥주를 더 마시고 투다리를 나와 여직원은 택시를 태워 보내고 나는 잠시 시장 골목을 걸었다. 그냥 맥주가 있었고 나는 시원하게 그것을 마셨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하다. 


첨: 2009년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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