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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타 Oct 15. 2016

신과 신과 어느 종말

봄이 여름이 되던 날에는 그랬다

1.

새벽이면 어머니는 마리아상 앞으로 나아가 양 옆의 초를 밝히고는, 무릎을 꿇었다.

묵주팔찌를 쥐고 알 하나하나마다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은 가족의 건강을 빌었고 어느 날은 내가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신실한 신자였다.

내 입시가 끝나고 나서 어머니는 더 이상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다만 종종 아버지의 건강을 언급했고 종종 나의 안전을 염려했다.


2.

나는 무신론자였다. 기도를 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진작 나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고 내 키는 165가 되었어야 했고 수능 수학에서 29번과 30번을 맞았어야 했다.

나의 세계는 얇은 단백질 막이었다. 계란프라이의 흰자처럼 금방 익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하지만 누구도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어긋나는 돌조각들만이 내 세계막에 파편으로 박혔다. 원형질막은 유동성을 띠고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뿐이었다. 세계는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지만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다.


3.

그리고 봄, 나는 신을 만났다. 그는 너무도 간단히 불을 붙였다. 나를 그저 바라봤다. 불이 붙었는데? 이게 전부야? 하는 눈으로. 나는 본능적으로 나의 세계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매 새벽 나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신이여, 그대의 유일한 신도에게 오늘도 사랑을 베푸소서. 다행스럽게도 매 기도는 신의 발끝에 닿았다. 종말의 직전까지도.


4.

종말은 조금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예를 들면 13월의 로또 1등처럼, 찰리의 초콜릿 공장처럼, 마녀의 과자집처럼. 신은 그렇게 말했다.

당분간은 네 기도가 나에게 닿지 않을 거야.

도착지를 잃은 기도는 아주 조금 서럽게 울었다. 손수건으로 접은 종이배가 뜰 수 있을 만큼만 서럽게. 봄이 여름이 되던 날에 비가 대신 울었고 종말이 오작교를 적셔 무너뜨렸다.


5.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나요?

비가 그치면.

비는 언제 그치는데요?

네가 오작교를 100번도 더 무너뜨리고 나면.

비가 그치면 건너갈 수 있어요?

그 때는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짓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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