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몸을 맡기듯

세상근심 바다에 던져버리고

by bellavita

아이들이 6월 8일에 방학을 했으니 어느새 한 달이 됐다. 이탈리아는 여름방학이 6월에서 9월까지 자그마치 석 달이다. 일을 해야 하는 부모들도 많으니, 아이들은 보통 한 달 정도는 동네에 있는 여름학교(centro estivo)에 등록해 아침부터 오후까지 수영하고 테니스도 치고 점심도 먹고 친구들도 사귀며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본격 휴가철이 되면 시골에 할머니 댁으로 내려가거나 , 바닷가에 집이 있는(별장처럼) 아이들은 바다에서 내내 여름을 보낸다.

이렇게 모두들 떠나고 나니, 여름이면 동네가 무척 한산하다. 대신, 외국인들만 유독 눈에 띈다. 시골에 친척도 없고, 자기 나라로 휴가도 못 떠난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올여름엔 아이들을 여름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도 몇 달을 못 갔는데, 여럿이서 수영하고 땀 흘리고 노는 데를 어찌 보낼 수 있겠나.

수영장은 불안해서 못 가지, 날은 덥고 답답하지, 오직 갈 곳은 한 곳. 바다뿐이다.


6월 어느 날, 로마에서 가까운, 차로 35분쯤 걸리는 focene바다로 향한다.

- 우리, 바다 가서도 마스크 써야 하나..?

- 글쎄. 쓰라면 써야겠지..

일단은 늘 그렇듯 식구 수대로 마스크를 꼼꼼히 챙긴다.

사실, 몇 달 전만 해도 해변가에 플렉시글라스를 설치해서 안전거리를 확보해서 여름휴가를 즐기게 하겠다, 는 기사들이 나왔었다. 그깟 바다, 한해쯤 안 가면 어때서, 유리를 설치하니 어쩌니 유난을 떤다 싶겠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여름은 곧 바다이다. 여름이 워낙 긴 데다가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차라리 에어컨을 켜놓고 집에 있는 게 더 시원할 듯한데, 태양을 사랑하는 이탈리아인들은 오히려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로 달려간다. 이미 5월부터 해가 조금만 따사롭다 싶으면 당장 바다로 나가 온몸을 달구며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이다.

봄에 바이러스가 무섭게 창궐했을 때, 올여름 어쩌면 바다에 못 갈 수 있겠다, 싶어 다들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잠잠해진 덕에 해수욕장도 문을 열었다.


바다에 도착해 해변가로 들어서니 입구에 주의사항이 붙어있다. 마스크 쓰고 거리 두고 소독제 바를 것 등등..입구에는 Bar가 있는데, 바 직원은 마스크를 쓰고 있고 화장실 앞에 소독제가 비치되어 있다.

따뜻한 모래를 밟고 바다 코 앞까지 걸어가 파라솔을 꽂고 자리를 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플렉시글라스가 있지도 않거니와 어차피 띄엄띄엄 파라솔을 꽂아두니 저절로 거리두기가 된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만들거나 헤엄을 치고 어른들은 얼굴을 햇볕에 들이밀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아무도 마스크를 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 하염없이 넓어 끝이 보이지가 않는 바다...

그 속에 우리는 모래처럼 점점이 박혀있을 뿐이다.

여기 우리 아이들이 깔깔대며 물장구를 치고, 저기 다른 아이들이 엎치락뒤치락 튜브를 타고, 저 멀리 젊은이들이 공놀이를 하고....바다는 한없이 넓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1미터, 2미터 간격 따윈 아무 의미가 없게 만든다. 일부러 지키지 않아도 저절로 거리가 생기고 마음껏 숨을 쉬어도 된다.

-바다에 있으니 바이러스고 뭐고 아무 생각이 안 나네

- 그러게. 딴 세상 같다


남편이랑 몇 마디 주고받자니, 다시 로마로 돌아가면 수퍼를 가든 어디든 마스크를 쓰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야겠지 싶어 불현 갑갑해진다.

마스크 없이 편히 숨 쉬며 사람 구경할 수 있는 한적한 바다, 이게 원래 우리가 살던 세상이다.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찜찜한 기분으로 만지고 소독제로 황급히 씻어내는 세상이 딴 세상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딴 세상이 현실이 되었고 익숙했던 현실은 딴 세상처럼 되었다.

다시는 코로나 이전으로 못 돌아갈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무엇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는 기사와 칼럼들, 이제는 제목만 봐도 피곤하다.

뒤집힌 세상에 익숙해지라는데 더 이상 뭘 익숙해지란 말인가. 남은 생 내내 마스크 끼고 사람 피해 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건가?우리 아이들이 과연 학교에서 뛰어놀며 자랄 수는 있는 걸까..? 이제는 뭘 하고 먹고살아야 하나? 머리만 복잡하고 결론은 안 나오는 질문을 해대다, 바다를 마주하는 순간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뒤죽박죽 된 세상에서 바다는,자연은 놀랍게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바이러스 따윈 아무 관심도 없고 아무런 상관도 없이 파도를 철썩대며 파랗게 빛난다.

튜브에 몸을 걸치고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겨본다. 춤을 추듯 마사지를 받듯 기분 좋게 일렁대다가 이내 잠까지 밀려온다.

-별 거 아니야. 그래 봤자 별 거 아니야..

바다가 내게 속삭이듯 위로를 건넨다.


오늘은 느즈막히 산책 가듯 바다에 다녀왔다. 7월이라 제법 날씨가 뜨겁고 바닷물도 따뜻하다. 에어컨 빵빵한 쇼핑센터에 가기도 겁나고 수영장 가기도 불안한 탓에 올여름엔 바다 신세를 꽤 지고있다.

첩첩산중에 살아서 바깥세상에 전쟁이 난 줄도 몰랐다는 이처럼 인적 드문 바닷가 섬에서 세상 일 아무것도 모른 체 삼시세끼 해 먹으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본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사태가 나름 정리되고 나서 바깥세상에 나온 뒤, -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야...별 일이 다 있었네.

이렇게 뒷북치며 말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저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듯, 세상 흘러가는 대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