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 방울 물이 되고 싶다

집 밖에도 못 나가는데 단수라니

by bellavita


갑자기 단수가 되었다.
좀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보통은 곧바로 치우는데 공연히 전화기를 들여다보느라 늑장을 피우다가, 설거지를 하려 보니 물이 안 나온다. 욕실 세면대에도 녹슨 물이 졸졸댄다 싶더니 이내 캄캄이다. 남편이 밖에 나가보더니 길가에 구멍을 파놓고 두어 명이 작업 중이란다. 단수될 거라 미리 통보한 적도 없으니 한두 시간이면 돌아오겠지 싶었다. 한데 공사 중이던 이들이 철수했는데도 영 소식이 없다. 설거지가 쌓여 냄새나는 부엌은 그렇다 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이들에게 좀 참아보라고 하는 건 쉽지가 않다.
아래층에 사는 주인 할아버지께 쪼르르 달려가 본다. 역시 할아버진 뭔가를 알고 계신다. 우리 동네에서 시내로 연결되는 큰길에 뭔가가 고장이 났는데 언제쯤 해결될지는 모르겠다고. "설마 오늘 저녁에는 되겠지?" "글쎄.Speriamo그러길 바래야지" 할아버진 웃으며 대답하시고는 "물 5리터쯤 줄 수 있는데, 가져가" 하시면서 원래는 와인병이었던 큰 유리병에 물을 담아 주신다. 그 덕분에 일단 화장실은 한두 번 정도 쓸 수 있게 됐다.


로마 살면서 단수가 된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평소 같으면야 급하면 동네 Bar에 가거나, 물이 없어 저녁밥 하기도 애매하니 맥도널드 가서 간단히 햄버거로 때웠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봉쇄령이 조금 풀린 덕에 Bar랑 맥도널드가 겨우 문을 열긴 했어도 테이크 아웃만 될 뿐, 가게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사람들을 다 집 안에 가둬놓고 물까지 끊어버리다니. 미리 얘기만 해줬어도 욕탕에 한 가득 받아놨을 텐데... 구시렁대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은 낮에 남은 밥이랑 참치캔으로 대충 먹었는데, 문제는 화장실이다. 저녁때까지 해결 못한 걸 보니 이태리 사람들 일하는 방식으로 봐서는 밤에도 안 될게 뻔하고 내일 아침이나 물이 나오면 다행일 듯싶다.
남편은, 급한 대로 동네 분수에 가서 물 좀 받아 오자고 한다. 여기서 분수란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처럼 멋지게 물을 뿜는 분수가 아니라 길 가에 있는 수도꼭지(fontanina)를 말한다. 로마는 길 가다 보면 중간중간에 수도꼭지가 달린 작은 분수들이 있어, 깨끗한 식수를 공급한다. 길 가다 목이 마르면 언제든지 고개를 옆으로 졎혀 물을 마실 수가 있다. 물론 산책하는 강아지들도 혀를 날름 대며 잘 받아 마신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이들에게 '집 잘 보고 있어, 엄마 아빠 물 뜨러 갔다 올게' 당부를 하고는
할아버지가 준 와인병(이미 다 쓰고 비웠다), 양동이 하나, 1.5리터짜리 생수병 빈 거를 들고 남편이랑 차를 타고 나섰다. 일단 가장 가까운, 차로 2분 거리에 있는 작은 화단으로 향한다. 근데 이상하다, 이 어두운 시간엔 길에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걸어가는 게 보인다.
설마...? 하는데 역시나 한 손에는 모두 양동이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아.... 다들 우리와 같구나. 남편과 큭큭대며 화단에 도착하니 벌써 대여섯 명이 분수 앞에 줄을 서 있다. 이런, 한참 걸리겠는데... 아이들만 집에 있는 게 걱정돼, 아예 좀 더 큰 공원에 있는 분수에 가보기로 한다. 그런데 작은 화단이 이 정도면, 평소에도 사람 많이 모이는 공원은 더 하겠지 싶다. 줄이 더 길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차를 타고 가는데, 동네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길에 수도꼭지 하나가 눈에 띈다. 아 맞다...!여기 하나 있었지..?!

예전에 장군이 산책시킬 때 함께 물을 마시곤 했었는데...장군이가 하늘나라에 가고 나서는 이쪽 길로 산책할 일도, 길 가다 물 마실 일도 없다 보니, 여기 분수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적한 길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하나 없다. 남편과 나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신이나 양동이를 꺼내 물을 받는다. 공짜 물인 것도 좋고 우리만 전세 낸 것 같아 더 좋다. "집에 갔다가 한번 더 오자. 두 번은왔다 갔다 하자!"는 내 말에 남편은 "이 정도면 됐어. 내일 아침에도 물이 안 나오면 또 받으러 오면 되지" 워워 진정을 시킨다.
양동이 물이 넘칠까 살살 운전하며 집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조심스레 물을 내리려는데 골목에 차 한 대가 들어온다. 좁은 골목이라 다시 차 문을 닫고 그 차가 지나가길 기다려준다. 이 밤엔 골목에 차가 잘 안 들어오는데..누구지?싶어 슬쩍 쳐다보니, 바로 옆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가 커다란 양동이를 세 대나 차에서 내리고 있다. 어머.. 저 아주머니도 물을 길어오셨네...
남편과 나는 또 한참을 웃는다. 다들 집에 갇혀있는데 예고 없이 단수가 되니, 화장실도 못써, 씻지도 못해, 밥도 못해.. 순식간에 집 안 꼴이 엉망이다.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무거운 물동이를 짊어진다.
밤 마실 덕분에 우린 이날 밤 대충이라도 아이들을 씻기고 재울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지런해 일찍 일어나는 남편이 설거지를 하나보다. 아, 그럼 이제 물이 나온다는 건가? 거참 다행이네... 게으른 나는 다시 눈을 붙인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새벽 한 시쯤부터 물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물이 있으니 참 좋다. 화장실도 맘껏 쓰고 설거지도 안 미루고, 이불 빨래도 잔뜩 한다. 늘 그렇듯 한 번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만약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고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한 방울 물이 되고 싶다고.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정말로 있고 감히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이나 동식물, 다시 말해 생명이 있는 그 무엇으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생명은 기쁨이자 곧 괴로움이기에...대신 어떤 모습으로든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면 한 방울 물이 되고 싶다. 강물에 떨어지면 강이 되고 바다에 떨어지면 바다가 되고, 더우면 한 김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고 무거워지면 빗방울이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질 테다.
냄새 고약한 개똥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운 좋으면 우리 막내딸처럼 어여쁜 아이의 이마에 떨어지기도 할 테다.혹은 길 가 수도꼭지에서 사람들 목을 축이고, 혹은 트레비 분수에서 우아한 거품이 되어 뿜어져 나올 테다.

물 흐르는 대로 살아야 삶이 덜 힘들다던데, 물이 되면 비로소 물 흐르는 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한 방울 물이 될 수 있다면...물이 새삼 귀하고 소중한 날, 욕심 많은 꿈을 꿔 본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와인병에 퍼주신 5리터 물.

맘 좋은 할아버지 고향은 Abruzzo-로마에서 차로 두 시간쯤 떨어진 지역이다. 와인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이탈리아 지역이 그렇듯 ^-^